[사이언스온고지신]면역이 흐를 때 몸은 낫는다, 어혈의 렌즈로 본 루푸스

2025-11-10

현대 의학은 면역 과잉을 질병으로 본다. 반면 한의학은 오래전부터 '흐름의 병리'인 어혈로 정체된 몸의 반응을 설명해 왔다. 피가 탁해지고 순환이 막히면 통증·종창·변색이 나타나듯, 면역이 한곳에 머물면 염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과학은 이 오래된 직관이 단순 비유가 아님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어혈은 혈전(피떡) 같은 단일 현상과 동의어가 아니라, '흐름이 막혀 오래 지속되는 병리'라는 넓은 개념이다. 이 한의학적 용어를 오늘의 면역학으로 옮기면 면역 흐름이 막힌 상태, 곧 병적 면역 정체라 할 수 있다. 어혈은 혈류가 정체되듯, 면역세포·사이토카인·항체가 조직 속 작은 자리에 오래 머물러 염증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 즉 제3 림프조직(TLS)의 비정상적 형성과 고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면역계 이상으로 여러 장기에 만성적인 염증과 손상이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SLE)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질환이다. 루푸스 환자 신장·폐 등에서는 조직 내 TLS가 자주 관찰된다. TLS 내부에서는 자가반응 B세포(자가 항원을 외부 물질로 오인하고 공격하려 하는 면역세포)가 성숙하고, 자가항체가 계속 만들어진다. 본래 TLS는 감염이나 손상 부위에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임시 면역 거점이지만, 소멸하지 못하고 굳어질 때 염증은 '흐르는 사건'이 아니라 '머무는 구조'로 바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어혈 개념과 현대 면역병리의 실체가 정확히 겹친다. 한의학적 언어로 보자면 TLS는 '어혈이 풀리지 않은 상태'와 닮은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물론, TLS 소견은 '루푸스를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으나, 확진 기준은 아니다. 어혈 소견 또한 현재로서는 루푸스를 직접 진단할 근거는 아니다. 다만 TLS의 정체가 뚜렷하고 오래 지속될수록 자가면역 활성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고, 여기에 개인 유전적 감수성이 더해지면 루푸스 위험이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어혈 역시 위험 신호로 참고할 수 있다. 즉, 표준 검사와 임상 소견을 같은 시점에서 묶어 종합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혈과 루푸스의 연관성에 대한 간접 증거도 있다. 자궁내막증은 통증·혈괴·착색 등과 같은 어혈과 상응하는 증상이 흔한 대표 질환이다. 인구 기반 코호트와 메타분석에서는 자궁내막증 환자 루푸스 발생 위험 증가가 보고됐고, 일부 연구는 자궁내막증 치료가 루푸스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반대로 루푸스 환자에서 자궁내막증 진단 위험이 높다는 결과도 있다. 이런 보고들은 정체 환경 즉, 어혈과 자가면역 위험의 연결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역학적 단서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상에서는 표준 지표와 위험 인자를 함께 보며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이런 '흐름의 관점'은 루푸스의 이질성을 읽는 데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단순히 '면역 활성 수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차이를, '면역 정체의 강약'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에서는 정체 지표와 임상 지표를 같은 시점에 묶어 해석하고, 치료에서는 단일 억제보다 구조와 흐름, 기능을 함께 겨냥하는 다중 표적 전략을 설계할 수 있다. 연구 측면에서는 환자 유래 TLS 모델과 실제 장기 병리를 동일 개체 기준으로 연동하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전통 개념을 활용해 현대 질병 설계도를 다시 그리는 셈이다.

결국, 어혈을 푼다는 것은 피를 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막힌 흐름을 다시 통하게 하는 일이다. 루푸스 역시 마찬가지다. 면역 흐름을 회복하는 치료를 함께 시도한다면, 질병 악화 위험을 줄이고, 개인에 맞게 돌보며, 더 나은 일상과 오래 지속되는 안정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최수산나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 susannachoi@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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