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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화자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이런 답답한 양반, 이렇게 손해만 봐서 어떻게 살아간담? 애처로운 마음마저 들었다. 힘들다는 사장의 입장을 헤아리며 “매년 연봉 협상에 실패했다”는 고백에 한숨이 나왔다. 이상하지. 시를 반복해 읽을수록 무언가 달리 보였다. 길을 일부러 돌아가는 택시 기사 앞에서, 최선을 다해 키웠으니 이제 효도해야 하는 건 자식이라고 넌지시 입장을 다지는 부모 앞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여러 사람 앞에서 화자는 ‘아는 사람’인 게다. 알면서 당하는 사람, 알면서 져주는 사람, 가엾은 당신들을 위해 손해를 감수해 ‘주는 사람’이다. 사회생활에서 이기는 대신 이기려는 자를 가엾게 여기는 순간, 위치가 역전되며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쪽인 게다. 이때 ‘주다(give)’는 ‘알아주다’ ‘헤아려주다’ ‘품어주다’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파리를 떨구고 선 겨울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무엇이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손해 보지 않으려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약자의 위치에 서본 적 없는 사람, 그늘에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손해를 손해인 줄 모르고 담담히 끌어안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갈 것 같다.
사는 일이 손해 보는 장사 같을 때, 왠지 모를 열패감이 들 때 이 시를 기억하자. 지는 사람은 곧 주는 사람이다. 받기만 하는 사람은 끝내 모를 주는 자의 기쁨이여! 인생에서 손익만을 따지다 추한 모습으로 늙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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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