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폭탄 정책은 우방을 비롯한 모든 교역국에 경제적 비용을 강제한다. 나는 이 정책을 보면서 J M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 1919』을 떠올렸다.
재무성 관료였던 37살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1919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 핵심 의제는 승전국에 대한 패전국 독일의 전후 배상 문제였다.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미국은 독일에 1320억 골드 마르크(2025년 기준 6050억 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케인스는 배상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히려 승전국이 패전국의 경제 재건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승전국 지도자들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독일의 배상금 문제를 베르사유 조약에 담았다. 케인스는 재무성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 후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책이 바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었다.
독일에 가혹한 배상 반대한 케인스
전세계 성장·평화 위해 관용 주장
2차 대전 후 미 ‘마셜 플랜’에 영향
트럼프식 보호무역, 미국 구원할까
당시 프랑스, 영국, 미국은 모두 독일의 경제적 재건을 반대했다. 적성 국가가 발전하지 못 하게 해야 자국 번영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원전 2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패전국 카르타고를 광대한 영토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 청구로 흔적조차 남지 않게 파괴했다. 그 후 로마는 부국강병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카르타고식 평화’를 계승한 것이다.
케인스는 왜 이런 식의 고전적 평화 방식에 반대했을까? 케인스에게 근대자본주의 이후의 역사란 국가 간 ‘상호의존적 협력에 의한 경제 발전’의 과정이었다. 그는 1870년 알자스-로렌 지역의 영토권을 둘러싼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당시 승전국 프로이센은 카르타고식 평화를 위해 패전국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렸다. 그 결과 패전국 프랑스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승전국 프로이센도 배상금으로 일시적 호황은 누렸지만, 장기적으로는 무역 불균형과 1873년 대불황으로 인해 재정위기에 빠졌다. 한 나라의 빈곤과 인플레이션은 인접한 나라의 경제발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케인스는 이러한 상호의존적 경제체제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도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가혹한 배상금 정책은 결과적으로 독일에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을 가져올 것이고, 그다음엔 사회주의의 지배를 받거나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 후 독일은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을 거쳐 궁극적으로 극우화된 나치 정당이 집권했고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 미국은 이러한 교훈을 살려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1948년에는 오히려 과거 케인스의 주장을 따라 우호적인 전후 복구와 대외원조를 추진하는 ‘마셜 플랜’을 실시했다. 그 결과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고,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게 했다. 이러한 귀결을 이미 예견했던 케인스는, 승전국과 패전국을 모두 포용한 동반성장과 번영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1945년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1948년 출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거쳐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이어지는 전후 세계 경제 체제는 인류사상 최대 규모의 전 지구적 번영을 가져왔다. 공업생산도 세계무역도 크게 증가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말에 대공황이 찾아오고 1930년대에 세계무역이 감소했던 사실과 대조적이다. 이는 단적으로 ‘케인스식 평화’와 카르타고식 평화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건국 이후 미국은 원래 자유무역을 주도하던 나라가 아니었다. 신생 미국은 국민에게 소득세를 걷는 대신 외국 제품에 관세를 매겨 세입을 충당했고, 독립 후 100년간 연방정부 재정을 80% 이상 관세로 보전했다. 그 후 1930년대까지 최대 60%에 가까운 높은 관세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제조업을 육성하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세계 자유무역을 견인하면서 서비스업에서는 흑자를 냈지만, 제조업에서는 공동화(空洞化)를 겪고 적자가 쌓여가는 나라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건국 초기처럼 보호무역으로 제조업을 부흥시켜 다시 황금기를 이루겠다는 계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립주의 시대에 작동했던 관세정책으로 거미줄보다 더 촘촘하게 얽힌 공급망 체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미국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관세전쟁이 걷잡을 수 없는 다자간 국제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근대자본주의 역사와 전후 세계 정치 경제 질서의 도도한 흐름을 읽었던 케인스의 혜안을 참고하기를 기대한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