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경제 블록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

세계 경제의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 속 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년간 세계 경제를 지탱해 온 다자주의 무역 질서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세계 경제 시스템이 80년 만에 리셋되고 있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표현대로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7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1995년 출범해 30년간 이어져 온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종식을 선언했다. WTO 체제를 대체하는 건 관세 등을 무기로 다른 나라의 무역 장벽을 철폐하는 ‘트럼프 라운드’다.
30년간 이어진 ‘WTO 체제’ 종식
본격 결집하는 ‘대트럼프 전선’
성장 잠재력 크고 영향력 느는
저위도 개도국에 주요국 러브콜
무역 우회로로 공급망 재편하고
‘페트로 달러’ 체제 균열낼 수도

‘트럼프 라운드’에 따른 세계 경제의 새판짜기는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한국과 일본, 영국·호주 등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미국이 넘어야 할 장벽은 만만치 않다. 새로운 체제에 맞서는 ‘대(對) 트럼프 전선’의 결집이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대 트럼프 전선’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국가는 트럼프의 고관세를 두드려 맞은 중국과 인도(50%)·브라질(50%)이다. 이들의 밀착은 가속화하고 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7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지난 12일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각각 통화했다.
국경 분쟁으로 냉랭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중국과 인도도 가까워지는 분위기다. 모디 총리가 오는 31일 개막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톈진을 방문한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모디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는 건 7년 만이다.
이들의 공동 전선에는 러시아도 빼놓을 수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일에는 시 주석과 모디 총리, 지난 9일엔 룰라 대통령과 각각 통화하며 전선을 공고히 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미국 등 서방의 각종 제재가 계속되고 있지만 중국과 인도는 이에 아랑곳않고 원유 구매 등 러시아와의 교역을 이어가며 미국의 미움을 샀다. 미국이 인도에 50%의 고관세를 부과한 것도 러시아산 원유 구매와 무기 수입에 대한 징벌 성격이 강하다.
120개 개도국 아우르는 빅텐트
이처럼 트럼프에 맞서는 전선을 구축하는 브릭스(BRICs)가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세력이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다. 글로벌 사우스는 남반구 또는 북반구 저위도에 자리 잡은 제3세계 개발도상국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의 120여개 국가를 아우른다.
사실 글로벌 사우스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빅텐트’에 포함된 국가의 여러 성격만 봐도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글로벌 사우스의 출발점은 냉전 시기 신생 독립국 중심의 개발도상국으로 이뤄진 제3세계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본주의 세력이나 소련을 또 다른 축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을 일컬었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개념이 본격화한 건 1980년 ‘브란트 보고서’에서다.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세계은행 총재 등이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격차를 조사할 위원회의 필요성을 제창하며 1977년 ‘국제개발문제 독립위원회’를 꾸렸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위원장을 맡았다. 3년 뒤인 ‘남과 북-생존을 위한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국제연합(UN)에 제출하면서 ‘남북 문제’를 공론화했다.
글로벌 사우스의 또 다른 축은 브릭스다.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의 교집합은 넓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인도와 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기존의 브릭스 멤버가 글로벌 사우스에 속한 데다 이집트·에티오피아·인도네시아·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으로 회원국을 확대하면서다. 멕시코와 튀르키예 등의 가입까지 추진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에서 브릭스의 입김은 더 세질 전망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성격의 글로벌 사우스가 ‘트럼프 라운드’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부각되는 건 커지는 영향력 때문이다.
전 세계 GDP 21% 차지하는 세력 등장

도이체 방크가 지난 5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따르면 경제 규모로 볼 때 전 세계 명목 국내총생산(GDP)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비중은 21%다. 미국(27%)과 유럽(23%), 중국(19%)과 함께 4강을 이룬다. 글로벌 사우스를 ‘세계 4번째 블록’이라고 명명한 이유다. 일본·한국·이스라엘·호주 등 친미 국가의 비중은 10% 수준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는 더 높아진다. 전 세계 34%를 차지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성장 잠재력은 더 크다. IMF에 따르면 2023~29년 글로벌 사우스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3%로 북반구에 몰려 있는 선진국을 통칭하는 ‘글로벌 노스’(Global North·3.9%)를 훌쩍 앞선다. 게다가 전 세계 생산가능인구(15~60세)의 63%가 글로벌 사우스에 있다. 인구 보너스를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늘어나는 인구가 경제 성장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소비 여력도 상당한 만큼 새로운 시장으로 눈독을 들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원도 풍부하다. 전 세계 에너지 및 전기차 배터리 생산 등에 필요한 광물의 41%가 글로벌 사우스에서 생산된다. 매장량으로 따졌을 때도 글로벌 사우스는 핵심 광물의 중심지다. 리튬 1위는 칠레, 니켈 1위는 인도네시아다. 코발트 매장량 1위는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매장량 3~5위 국가가 모두 글로벌 사우스 국가다.
전 세계 무역에서의 글로벌 사우스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세계 무역의 25%를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 국방비 지출의 18%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뤄지고, 이 지역 증시 시가총액은 전 세계 증시 시가총액의 11%를 차지한다.
중국, 식량 수입 남미 국가로 이동
이처럼 세계 경제에서의 비중이 커지고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글로벌 사우스가 국제 질서 지형도를 바꿀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국제금융센터는 지난 1월 보고서에서 “트럼프 2기 동안 미국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이어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경제력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국제 질서가 더욱 다극화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사우스는 세계 무역의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신냉전 시대 미·중 갈등 구조 속 불확실성이 커지며 ‘중국 제조-미국 소비’의 글로벌 생산 구조가 더는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가 글로벌 공급망 이동과 원자재 수급망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글로벌 사우스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미 흐름은 본격화하고 있다. 이익을 보는 곳 중 한 곳은 인도다. 애플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이라는 전략하에 인도 생산 능력을 늘려왔다. 중국 의존도를 낮춰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다. 중국의 제3국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견제를 피하기 위해 생산 공급망을 아세안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브라질 등으로 넓혀가고 있다.
원자재 시장 수급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수입선 다변화를 위해 중국이 식량 수입을 브라질 등 남미 국가로 확대하면서 지난해 중국의 최대 콩 수입국은 브라질이 됐다. 2023년 브라질의 대중 무역 비중은 24%로 미국(16%)을 앞질렀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중국의 해외 광산 사업 중 30% 이상을 아프리카가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결속은 ‘페트로 달러’ 체제에도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 페트로 달러 체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수출 대금을 달러로만 결제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함으로써 유지돼 온 달러 중심의 국제 경제 및 금융 질서다. 페트로 달러 체제에서 원자재 거래 결제 통화로 달러가 사용되면서 중동 국가들은 원자재 판매로 번 돈을 달러 자산에 투자하며 외환보유액을 쌓았고, 달러 패권은 공고히 유지될 수 있었다.
낮은 교육 수준·부패는 한계로 지적
하지만 셰일 가스 생산 등으로 미국의 원유 수요가 줄면서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입김은 더욱 세지고 있다. ‘페트로 위안’은 ‘페트로 달러’를 잠식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파키스탄 등은 저렴한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면서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중국과 사우디가 원유 거래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글로벌 사우스의 몸집이 커지며 미국 달러를 지급 및 가치 저장 수단으로 사용하는 ‘달러리제이션(Dollarization)’도 위축될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은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한계 또한 분명하다. 생산가능인구가 급증하는 것은 글로벌 사우스의 강점이지만 양질의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교육 수준이 낮은 데다 일자리가 제한적인 탓에 높은 실업률과 사회 불안 문제가 상존하는 것은 글로벌 사우스의 약점이다. 풍부한 자원은 글로벌 사우스에 양날의 검이다. 개발과 성장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막대한 국가 부채도 글로벌 사우스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