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1일 오후 SK하이닉스 이천 본사를 찾았다. 사전에 공지된 일정에는 없던 깜짝 방문이었다. 총리실 관계자는 “주 후반쯤에 찾으려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와 당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선 야당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을 압박하며 한 대행 탄핵을 거론하는 상황에서, 침묵을 지켜온 한 대행이 경제 행보로 맞불을 놓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한 대행은 약 45분간 SK하이닉스 이천 현장에 머물며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등 기업 임원진과 간담회를 갖고, 반도체 공장을 시찰했다. 한 대행은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전 세계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을 흔드는 산업의 새로운 도전이 오고 있다”며 “정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우리 사회에 닥친 문제를 적시에 지체 없이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 대행은 또 4월 1일 출범하는 경제안보전략 태스크포스(TF)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안보전략 TF를 발족시킨다”며 “정부 각 기관을 맡은 장관과 경제에 크게 기여하는 기업인이 같이 시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행은 또한 “정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미래를 위해 반도체 등 첨단전략 산업에 대한 지원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며 “시행령 개정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통해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저해하는 낡은 규제를 과감히 혁신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한 대행의 모두발언도 사전 원고가 없었던 즉석 발언이었다. 한 대행은 지난주 국정에 복귀한 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2일 발표를 예고한 더티 15(상호 관세 명단)에 대응해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주재해왔던 대외경제현장간담회를 자신이 주재하는 경제안보전략 TF로 격상시켰다. 정부 부처와 재계에 따르면 첫 회의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 대행은 지난 24일 헌재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국정에 복귀한 뒤 마 후보자 임명과 관련해선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0일 한 대행이 1일까지 마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을 경우 다시 탄핵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한 대행은 여전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31일 오전 총리실 내부 회의에서도 부처별 현안만 챙겼다는 게 총리실의 설명이다.
정부 내부와 여권에선 최근 한 대행의 행보를 두고 “탄핵을 각오한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한 대행은 4월 1일 국무회의 전 국무위원 간담회를 소집해 야당이 일방 통과시킨 상법 개정안을 논의한 뒤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방침이다. 거부권 법정 시한은 4월 5일로 여유가 있지만, 한 대행이 서두르는 것을 두고 여권에선 야당의 탄핵 압박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여권 관계자는 “한 대행이 자신의 선에서 이 문제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행은 지난해 말 여야 합의가 확인되지 않았고, 권한대행의 권한은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국회 추천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 3인(마은혁·정계선·조한창)의 임명을 보류한 뒤 하루 만에 탄핵을 당했다. 당시 참모들에게 “탄핵은 두렵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한 대행은 여전히 여야 간 이견이 있고, 윤 대통령 탄핵 심판에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는 마 후보자를 권한대행이 임명하는 것은 권한 밖의 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