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두흥 수필가/논설위원>
사람들은 누구나 본명이 있으나 다양한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 꼬리표란 어떤 인물이나 사물에 으레 따르는 평가나 평판을 남들이 본명 대신에 지어 부르는 이름이다. 사회생활에서 출신 학교는 평생을 쫓아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훈련소에서 ‘고문관’으로 찍힌 한 동료가 훈련과정을 마칠 때까지 힘들어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매사에 굼뜨고 말이 어눌했다.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한 번 붙으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이 꼬리표다.
남들은 듣기 거북한 꼬리표를 무심코 붙이지만, 그것을 품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듣기 좋은 꼬리표야 붙여도 손해 볼일 없으니 괜찮을지 모르나 비아냥거리는 말은 그냥 두면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힌다. 가방끈의 길이가 훈장처럼, 때로는 족쇄처럼 평생 따라가는 게 현실이다. 가방끈이 길어 출세하면 이는 당연하고, 가방끈 짧은 사람이 성공하면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떠벌인다. 일류대 출신은 엉뚱한 헛소리를 해도 고개를 끄덕이지만, 국졸이면 무식한 소리 말라고 면박을 준다. 그뿐 아니다. 사법고시 관문을 통과하고 판사까지 지낸 대통령도 고졸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꼬리표가 붙는다.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에 꼬리표가 여러 개 달려 있듯 누구나 싫든 좋든 몇 개쯤 달고 산다. 한 집안의 가장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로 불린다.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세탁소에 맡긴 수많은 세탁물에 이름표를 달듯, 사람들도 저마다 꼬리표를 달고 있다. 세상과 인연을 맺으면서 시작되는 출생부터 가문, 학벌, 재력, 외모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원한다고 달 수 있거나 싫다고 떼어 버릴 수 없는 것이 꼬리표다.
마음의 구멍이 뚫릴 때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에게 전가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거나 스스로 상처를 받게 만든다. 이런 상대가 편하면서 늘 마주 보는 가족이 아닐까. 가족은 서로 마음을 잘 알고 있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상처가 되는 말을 골라 하지 않아도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는 비수가 되거나 꼬리표로 남는다.
마음은 공과 같아서 탄력을 잃으면 공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 쓰다듬고 소중히 여기며 잘 보살필 의무가 있다.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남의 시선과 목소리를 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거울을 닦듯 깨지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처럼, 나만의 꼬리표가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남을 바라볼 때 ‘그러려니.’ 그런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서로 상처받을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다. 나를 빛내려면 얼마만큼 닦고 가꾸었느냐에 따라 닦은 만큼 보인다. 나만의 꼬리표를 만들려면 마음을 단단히 갖는 것이다. 감정에 솔직하고 잘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살면서 남길 수밖에 없는 흔적들이 꼬리표가 된다. 꼬리표가 사라짐은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음이다. 삶이 마감하는 날에도 꼬리표가 하나 더 붙을 것이다. ‘사람의 평가는 관 뚜껑을 닫은 후’라 했다. 무덤에 갈 때까지 최선을 다해 마음의 밭을 일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