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퍼을(乙)'의 자신감일까?
반도체 장비 기업 한미반도체의 'TC(열압착)본더' 사진엔 늘 '특별함'이 있다. 신제품 옆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단순한 홍보 차원일 수 있지만, 재계에선 이 장면 하나에 곽 회장과 회사의 위상 변화를 둘러싼 복합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며 여러 해석을 내놓는다.
"TC본더 1위 변함 없다"···변곡점마다 등판하는 곽동신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미반도체는 주요 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곽동신 회장을 전면에 내세워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한미반도체가 최근 공개한 HBM4(6세대 고대역폭메모리)용 TC본더 사진에도 어김없이 곽 회장이 등장했다. 검정색 정장을 입고 신제품 옆에 선 그는 다시 한 번 기술 우위를 재확인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듯 당당함이 묻어난 제스처로 눈길을 끌었다.
곽 회장의 코멘트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신제품 TC본더에 대해 "고도의 정밀도를 요하는 HBM4 특성에 맞춰 경쟁사 대비 생산성과 정밀도가 대폭 향상된 게 특징"이라며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 블랙웰 울트라도 한미반도체의 TC본더로 생산되며, 회사의 세계 점유율 1위 위상과 경쟁력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곽 회장의 과감한 행보에 대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리더십을 시각화한 경영전략이겠지만, 그처럼 존재감을 전면에 드러내는 B2B(기업간 거래) 기업 총수는 상당히 드물어서다. 공급망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산업 생태계 특성상 곽 회장처럼 거래 기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곽 회장은 회사가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내놓으며 소통에 나섰다. 일본 수입에 의존하던 반도체 패키지용 '듀얼척 쏘' 장비를 처음으로 국산화한 2021년, HBM용 '듀얼 TC본더 1.0 드래곤'을 출시한 2023년에도 제품과 함께 서 있는 그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AI 반도체' 시장 내 한미반도체의 비중을 감안한다면 어색한 광경도 아니다. 이 회사는 SK하이닉스의 HBM에서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로 이어지는 밸류체인의 한 축으로서 수년간 TC본더 1위 자리를 지켜왔다. 현재 전세계 320개 기업과 거래 중인데, 선단 공정인 HBM3E 12단은 90% 이상이 이들의 TC본더로 만들어진다. 그런 만큼 곽 회장 입장에선 나름대로 자신감을 표현한 게 아니냐는 게 일각의 시선이다.
TC본더에 대한 곽 회장의 애정도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의 버팀목이자 핵심 제품일 뿐 아니라, 자신이 사업을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업주 고(故) 곽노권 회장의 장남 곽 회장은 1998년 한미반도체에 합류한 이래 영업 등 일선 부서에 경영수업을 받다가 TC본더 개발을 지휘했고 회사를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렸다.
경쟁자 등장에 흔들리는 입지···한미반도체의 속내는?
다만 업계가 최근 들어 한미반도체의 그 사진에 주목하는 배경은 다른 데 있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에 한미반도체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는 진단에서다. 즉, 이들 스스로도 곽 회장이 나서야 할 정도로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체감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그만큼 한화세미텍의 추격은 매서웠다. 작년부터 SK하이닉스로부터 TC본더 퀄테스트(품질 검증)를 받아온 이들은 3월 총 420억원 규모의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업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무엇보다 한미반도체의 독점 구도를 깨고 시장을 경쟁체제로 바꿔놨다는 데 큰 관심을 받았다.
따라서 시장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곽 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을 과거와 달리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게 일각의 시선이다.
크고 작은 헤프닝도 있었다.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제품 가격 인상(약 28%)을 통보하고 이천공장 HBM 생산 현장에 파견한 CS(고객 서비스) 직원을 일시적으로 회사에 불러들인 게 대표적이다. 당연히 TC본더 개발 단계부터 함께 한 오랜 동맹 관계에 균열에 생겼다는 데 서운함이 앞섰겠으나, 결국 한화세미텍을 의식한 것이란 해석도 존재한다.
일단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428억원)와 한화세미텍(385억원) 양사에 모두 TC본더를 추가 발주하면서 첨예한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불편한 동행이 계속되는 한 경쟁사 간 충돌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두 회사는 특허침해 의혹을 둘러싼 법정 공방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 한미반도체 측은 한화그룹으로 편입된 아워홈에 급식 계약 조기 해지를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