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인터뷰 “찬란한 손해의 절정은 십자가의 예수.”

2025-12-18

2025 성탄 인터뷰-고진하 목사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의 시골마을에서 11일 고진하 목사를 만났다. 그는 등단한 시인이자 영성가다. ‘불편당’이란 당호를 걸어놓고, 낡은 한옥에서 불편을 벗삼아 일상의 시어와 영성을 일군다. 하루 중 사랑채 아궁이에 앉아서 불 때는 시간이 유독 좋다는 그에게 ‘성탄’을 물었다. 고 목사는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배운 영어 단어가 ‘메리(merry)’라고 했다.

메리, 무슨 뜻인가.

“‘메리 크리스마스’ 할 때 ‘메리’다. ‘즐겁다’는 뜻이지만, 좀 더 떠들썩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시골 교회의 성탄이 그랬다.”

고 목사의 고향은 영월군 주천면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동네 예배당을 들락거렸다. “시골에는 마땅한 놀이가 없으니까. 시골 교회 목사는 가난했다. 그 집에 아이들도 많았다. 딸 넷에 아들 둘.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힘드니까 흰 염소를 키웠다. 그 젖을 짜서 그 댁 아이들이 팔러 다녔다. 이웃집에 산다는 이유로 나는 자주 그 집에 갔다. 그때 ‘예수’를 생각했다.”

왜 예수를 생각했나.

“그때는 시골에 분유도 없을 때다. 구경도 못 했다. 한 번은 내가 몸이 약해서 쓰러졌다. 목사님이 너 다리에 기운이 없어서 그렇다며, 내게 따뜻한 염소젖을 주셨다. 그리고 직접 내 발과 다리를 씻어주셨다. 그때 생각했다. 아, 예수라는 분은 나처럼 약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존재를 돌봐주는 분이구나.”

고 목사는 “그런 기억이 내가 목사로 살면서 나를 지켜냈다. 나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최인호 작가의 소설 『상도』를 다시 꺼내서 읽었다며,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 이야기를 했다.

“임상옥이 이런 말을 했다.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윤이란 뜻이다.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오면 임상옥은 자기 창고를 열어서 백성을 살렸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재물도 고이면 썩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예수의 자비를 본다.”

“예수의 자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고 목사는 오래전에 읽었다는 한 원로시인의 시구를 짧게 읊었다. “자비란 흉한 이익이 아닌 것/그것은 찬란한 손해.” 고 목사는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건 무자비다. 자비는 그런 식의 흉한 이익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손해 보는 짓은 안 하려고 한다. 손해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손해에도 ‘찬란한 손해’가 있다.”

찬란한 손해, 어떤 건가.

“내가 커지는 손해다. 좁은 박스 속에 갇혀 있던 에고가, 박스를 깨고 나와서 더 확장하게끔 하는 손해다. 인간은 그런 손해를 통해서 자란다.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해진다. 그러니 ‘찬란한 손해’는 내게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 않나. 인간은 그런 손해를 통해서 더 확장되고, 그런 확장의 과정이 찬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찬란한 손해’다.”

그리 보면 십자가의 예수야말로 ‘찬란한 손해’ 아닌가.

“그렇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나를 먹어라’고 말했다. 예수는 먹는 존재가 아니라 먹히는 존재다. 우리는 어릴 적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란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고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유지한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먹는 존재가 아니라 먹히는 존재가 되는 거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청정한 먹거리다.”

하늘에서 내려온 청정한 먹거리. 그걸 통해 예수께서 건네는 메시지는 뭔가.

“그 음식을 먹고 너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예수가 돼라. 그 젖을 먹고 너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엄마가 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그 말 끝에 고 목사는 중세 독일의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의 어록을 꺼냈다.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덜어내는 거다.’ 고 목사는 “손해도 그렇다. 찬란한 손해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는 일이다. 그걸 통해 우리는 예수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게 자꾸 덜어내면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해지지 않나.

“아니다. 거꾸로다. 덜어낼수록 점점 더 풍요로워진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비단 포목상의 아들이다. 그걸 걷어차고 나왔다. 잘 지어진 교회나 건물도 걷어찼다. 그리고 들판으로 나갔다. 굶주린 사람들과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그게 왜 가능했나.

“그의 내면이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예수님도, 프란치스코도 우리에게 풍요로운 길을 일러주시고, 풍요롭게 살아라 말씀하신다. 풍요로운 삶. 그 과정에 찬란한 손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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