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월 3일 새벽, 원산
1933년 1월 3일 새벽 3시. 원산 광석동 47번지 백남주의 집에 50여 명이 무명으로 된 흰옷을 입고 모였다. 그날 새벽, 예수의 영이 지핀 유명화의 계시로 ‘예수교회’라는 이름이 정해졌다. 이용도, 한준명, 백남주, 이종현 부부, 이조근·이유신 부부 등이 그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다.
한준명은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신칙(神勅)으로 지어주신 명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 창립이 아니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께서 직접 한국 땅에 친림하시어 세우신 교회, 한국 고유의 영성과 기독교의 영성이 만나 서구 선교부의 재정적·신학적 지원 없이 자생한 토착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회 창립 5개월 후인 6월 3일, 평양에서 예수교회 창립선언이 공표되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닙니다. 기성교회의 내용 혁신을 기도(企圖)함이 종시일관(終始一貫)의 신념입니다.”
◆1930년대 초, 한반도 북쪽의 경건의 폭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일본은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조선에 대한 통제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기성교회는 형식주의에 빠져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갔다. 근본주의와 사회복음주의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협력체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철산의 김성도 부인이 기도 중에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래 예정이 아니다.”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재림주님은 참된 혈통을 세우신다. 금욕해야 한다.”
원산에서는 유명화가 신령역사를 시작했다. 백남주, 한준명, 박승걸이 스베덴보리의 신학으로 이것을 해석하며 『새 생명의 길』을 출간했다. 평양에서는 이유신이 신령역사를 통해 거짓 교리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을 주장했다. 산정현교회 신도들이 이를 강신극(降神劇)이라며 훼방했고, 교회는 관계자들을 출교시켰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에 심취해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탄생이었다. 일제의 압박, 선교사들의 거만함, 형식화된 교회에 저항하는 경건의 폭발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기성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신령한 영적 현상을 무당의 접신으로 몰아갔다. 이용도의 개혁 정신은 교권에 대한 위협으로 비쳐졌다. 초청받아 간 교회에서조차 그는 폭행을 당했다.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는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등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10월 2일, 이용도는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곳곳에서 축출당한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오직 예수!” 순수한 신앙을 바라는 이들에게 교파는 없었다.
◆2천 년 여정, 신부된 교회를 찾아서
예수는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신랑이 올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라’(마 25:1-13).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라고 예언했다. 기독교는 신부종교다. 2천 년 역사는 신부된 교회를 찾아 나선 성령의 여정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분별된 교회 공동체가 출발했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었다. 가톨릭이 부패하자 제1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성공회가 분립했다. 그러나 이들도 국교가 되자 제도화되고 형식화되었다.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청교도운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로 꽃피었다. 루터교에서 모라비아 교회로, 영국성공회에서 감리교회로 분립했다.
제3차 종교개혁은 미국을 중심한 영적 대각성으로 폭발했다. 19세기 말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태평양을 건너 조선에 도착했다. 1903년 원산에서 로버트 하디가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며 성령의 작은 불씨를 지폈다. 이것이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한국의 오순절, 평양 대부흥이었다. 신령한 한국교회가 출발한 것이다.
◆ 중세 페어 관계의 재현, 한국 신령집단
중세 유럽에서 신부신비가들의 영적 유산이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특별한 섭리적 구조가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페어 관계였다. 힐데가르트에게는 볼마르가, 메히틸트에게는 하인리히가, 카타리나에게는 레이몬드가, 테레사에게는 십자가의 요한이 있었다.
이 페어 관계는 단순한 협력이 아니었다. 여성은 내적 사명을 담당했다. 직접적인 계시와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여성성,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 하나님의 섭리를 밝혔다. 남성은 외적 사명을 담당했다. 여성들이 받은 계시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했다. 여성 신비가들은 평신도나 수녀로 제도적 권위가 없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영적으로 남성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남성 성직자들은 아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했다.
한국 신령집단도 그러했다. 김성도와 백남주, 유명화와 이용도, 이유신과 한준명. 여성은 독생녀 탄생을 책임지며 계시로 타락의 본질, 십자가의 의미, 육신재림, 혈통복귀의 비밀을 밝혔다. 남성은 예수교회를 창립하고 체계적인 교리로 신령집단을 통합했다. 중세 유럽의 페어 관계가 1930년대 한반도에서 재현된 것이다.
원산신학산의 백남주와 한준명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서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통해 유명화의 신령역사를 입류(influx), 곧 성령의 내임으로 해석했다. 신령과 진리가 하나 되었다. 계시를 통한 영적 체험과 성서 연구를 통한 신학적 체계화가 조화를 이루었다. 예수교회는 ‘교회 중의 교회’, 진정한 신부 교회였다. 3.1운동으로 일격을 받은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허울로 민족을 분열시켰다. 교회는 근본주의와 사회복음주의 간의 갈등에 빠졌다. 협력체계가 무너졌다. 바로 그때 신령집단이 나타나 기존 교파의 교권주의를 비판하며 독립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천국결혼, 최후 말씀의 완성 시대
예수교회에 특별한 계시가 내렸다. 천국결혼이었다. 결혼 상대자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계시에 의지했다. 영계에서도 영원히 함께 할 배필을 점지받았다. 천국결혼은 성자의 탄생을 기대했다. 성자의 출현에 의해 최후의 말씀이 밝혀지고 지상에 새 시대가 전개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한준명과 박승걸이 먼저 하늘이 점지한 여성들과 결혼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1934년, 여아가 태어났다. “성자가 태어날 것이라더니 여자아이라니!” 기성교회가 달려들었다. “거짓 예언으로 교인을 미혹했다! 거짓 예언하는 가짜 신이 사단(邪端) 아닌가?”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승운과 홍순애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승운은 예수교회 창립 멤버로서 중앙선도원 교육국 책임자였다. 홍순애는 이용도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장로교회에서 예수교회로 옮겨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승운이 계시를 받았다. 1934년 3월 5일, 예수교회 선도감 이호빈 목사가 주례를 섰다.
핍박은 오히려 순수한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시작된 2천 년 신부 찾기의 여정. 순교자들의 순결, 신비가들의 신부 영성, 개혁자들의 구도, 영적 대각성, 회개와 대부흥. 모든 것이 예수교회로 수렴되었다.
천국결혼으로 준비된 혈통적 기반. 신령과 진리의 조화. 이 모든 것이 어린 양 혼인잔치의 신부, 독생녀 한 분을 위한 준비였다. 1943년, 그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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