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고려아연이 가진 전구체 제조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했다.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을 외국 기업에 매각하려면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향후 MBK파트너스 측 투자금 회수(엑시트)에 차질이 예상되는 가운데,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경영권 방어 논리로 주장하는 ‘국가기간산업 보호’ 명분에 힘이 실리게 됐다.
고려아연은 18일 “2차전지 핵심 소재 기술인 전구체 원천 기술이 정부로부터 국가핵심기술로 최종 판정받았다”고 밝혔다. 해당 기술은 하이니켈 전구체 가공 특허로, 고려아연이 자회사인 켐코와 공동 보유한 기술이다. 양극재 핵심 원료인 전구체는 니켈·코발트·망간을 섞은 화합물인데, 하이니켈 전구체는 니켈 비중을 80% 이상으로 높여 에너지 밀도와 출력을 높일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이 기술을 국가첨단전략기술로도 지정했다.
중국이 전구체를 비롯한 양극재 소재 공급망을 장악한 가운데, 고려아연은 하이니켈 전구체의 국내 대량 양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켐코를 통해 울산시에 ‘올인원 니켈 제련소’를 착공했으며, 내년 중 시운전을 할 예정이다. 정부는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거나,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민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전자, 조선, 원자력 등 분야에서 70여 건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있다.
업계에서는 MBK·영풍 측이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하더라도 향후 엑시트 구상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고 본다. 해외 기업으로 재매각하기 어려워졌고, 현재 시가총액 20조원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고려아연을 인수할 국내 매수자를 찾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MBK는 과거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두산공작기계(현 DN솔루션즈) 매각 당시 해외 투자자와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국내 기업에 매각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사모펀드인 MBK는 고려아연 지분을 언젠간 매각해야 하는데, 국가핵심기술 지정으로 엑시트 시나리오를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켐코 같은 고려아연의 우량 자회사는 매각 1순위로 여겨졌는데, 이 계획도 힘들어져 MBK의 계산이 복잡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MBK 측은 고려아연을 중국 등 해외가 아닌 국내 기업에 매각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MBK 관계자는 “두산공작기계 때도 해외 투자자와 협상한 적 없고 1~3순위 모두 국내 기업이었다”라고 반박했다. 영풍과 MBK는 이날 고려아연의 국가핵심기술 지정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최대주주로서 고려아연의 핵심기술들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고려아연은 “국가핵심기술 지정으로 현재의 경영권 분쟁이 단순한 분쟁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으로 바뀌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기간산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강화한 최윤범 회장이 분위기 반전에 성공할지 주목된다. 앞서 최 회장은 자사주 공개매수 후 곧바로 유상증자를 발표했다가 철회하며 시장의 질타를 받은 상태다.
현재 MBK·영풍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39.83%로, 최 회장 측(34.65%)보다 5%포인트 이상 앞선 것으로 추산된다. 이르면 연말 열릴 임시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지분 7%대 보유)과 기관투자자들의 지지를 두고 양측이 경쟁할 전망이다. 최 회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임시주총에서 캐스팅 보트는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기관투자자, 소액주주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관투자자들은 중장기적으로 누가 더 회사 가치를 높일 것인가에 초점을 둘 것”이라며 “국가핵심기술을 누가 지속해서 발전시킬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사모펀드보다는 고려아연 현 경영진이 조금 더 유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