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창밖의 나무 한 그루

2024-09-13

사진 속에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다. 두 손으로 안으면 양 손끝이 닿을 정도로 가늘던 줄기는 여러 장의 사진들 속에서 점점 두터워진다. 잎을 잔뜩 매달아 도로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날도 있고, 헐벗은 가지마다 흰 눈을 수북이 얹고 있거나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비를 맞으며 서 있기도 하다.

나무는 ‘학림다방’ 앞에 선 가로수다. 학림다방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종로구 대학로 한자리에서 60년 넘게 성업 중인 곳이다. 서울대학교가 대학로에 있던 초창기부터 지성들의 단골다방이었고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도 시간이 고여 있는 명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30여 년간 학림다방을 운영해 온 이충열은 마치 나무처럼 한 장소에서 자리지킴을 하며, 다방 내부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마다 빠짐없이 플라타너스가 등장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어느 날은 나무 곁으로 구호가 쓰인 커다란 깃발을 들고 사람들이 뛴다. 폐지를 줍는 노인이 수레를 끌고, 멋쟁이 여성들이 나란히 걷는다. 온통 붉은 옷을 입은 ‘붉은 악마’들이 나뭇잎 하나 낄 틈 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때도 있었다. 민주항쟁이 한창이던 80년대 시위 행렬부터 90년대 대학로를 일상의 배경으로 오가는 행인들, 2000년대 월드컵 축제 열기까지가 사진 시리즈 ‘학림다방 30년’ 속에 담겨있다. 긴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구도로 찍은 특이한 사진으로 옛 시절의 버내큘러(Vernacular, 그 시대·지방·집단 특유의)가 가득하다.

이충열은 오랫동안 순전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대학로를 스쳐간 많은 예술인들을 기록한 ‘드러나지 않은’ 사진가였다. 가수 김광석의 빛나던 시절부터 얼마 전 작고한 김민기씨도 그의 사진 속에서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통과한다.

급변하는 서울 도심에서 사라지지도 허물리지도 않고 수십 년을 자리지킴 한 학림다방의 차창 밖 플라타너스. 사진 속에, 밑동이 최루탄 가스에 가려진 나무가 허공에 떠 있다. 나무가 겪은 시간이자, 80년대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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