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떠도는 반지성 / 천세진

2025-08-17

최근 한국 사회 구석구석을 횡행하는, 상대를 향한 적대적 언어와 극단적 풍경을 보고 있으면 로베르트 무질(1880-1942, 오스트리아)이 백 년 전쯤(1930년)에 발표한 소설 『특성 없는 남자』 1권에 들어있는 문장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다. 자기 자신의 범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뿌리 깊이 불신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 유대인을, 또한 축구 선수가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가치 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물이 단지 경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주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베르트 무질은 당시 유럽 사회를 채우고 있던 적대감과 불신이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전조를 통해 일찌감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전조를 느꼈던 이는 로베르토 무질만은 아니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1883-1946)는 1차 세계대전 전후 협상 과정에서 적대적 전후 처리가 경제적 파탄과 극단주의 정치세력의 부상을 불러오리라고 우려했고,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를 통해 상세히 밝히기도 했다. 알다시피 위대한 경제학자와 작가가 예견한 비극을 유럽인들은 결국 막지 못했다.

잠시 로베르트 무질과 『특성 없는 남자』를 살피고 가야겠다. 20세기 3대 독일어 문학으로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체코)의 『소송』, 토마스 만(1875-1955, 독일)의 『마의 산』, 로베르트 무질(1880-1942, 오스트리아)의 『특성 없는 남자』를 꼽는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들은 『특성 없는 남자』 1위로 꼽았다고 한다. 20세기 초 유럽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가를 탁월하게 진단한 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는 존재를 위해 꼭 필요하다. 경계가 없다면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 물방울조차 존재하기 위해 표면장력을 지닌다. 경계가 있어 몸이 생기고, 생각도 경계를 오갈 수 있어야 만들어진다. ‘너-나’의 인식이 경계 덕분에 생긴다.

경계와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공동체들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 차이와 맥락이 있어야 하고, 그 관계를 이해하려는 다양한 생각이 만들어진 후에야 공동체가 탄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식이 좋은 관계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경계 밖의 존재가 연인이나 친구가 되고, 적이 되기도 하는 것은 경계를 규정하고 관계를 해석하는 다양한 생각들 때문이다.

경계는 정치 영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트럼프가 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경계를 가르고 그 경계를 적대적으로 해석한다. 뿌리 깊은 불신이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 같다는 로베르토 무질의 걱정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케인즈와 무질의 우려 끝에 히틀러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해야 할까?

한국은 ‘경계’ 때문에 20세기에 이어 21세기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운명을 독하게 옥죄고 있는 ‘경계’를 정치적으로, 물리적(지리적)으로 먼저 만들었다. 그런 경계의 한쪽에 살면서 함께 사는 구성원들까지 둘로 나누고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사는 일을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온 나라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도 기형이다.

경계를 적대적으로 해석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정치적 패거리를 나누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과 문화에도 심각한 증오를 심는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작은 영역, 큰 영역 가릴 것 없이 적대와 증오의 언어가 넘치는 나라가 됐다. 경계 밖을 적으로만 이해하면 문화도 예술도 협애한 구덩이로 빠진다. 경계 밖을 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고 어두운 구멍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은 전쟁 밖에는 없다.

말 좀 할 줄 안다는 반지성적 선동가들이 앞세우는 적대적 언어에 부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말 좀 할 줄 안다는 것이 ‘지성’의 징표는 아니다. 지성은 경계 안과 밖의 존재들을 더욱 오롯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돕지만, 적대적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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