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 史淵]안중근의 독립정신

2025-08-18

안중근의 선도적 활약은 계몽 활동과 의병 투쟁을 실천으로 연계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게다가 하얼빈 의거는 흐트러진 민족의식과 꺾여버린 항일의지를 바로 세우는 버팀목이자 중추였다

안중근의 선도적 선택은 대한독립의 의미가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행하는 데 따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정수였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을사늑약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자와 관련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정부와 민간을 불문하고 매우 뜨겁다. 내란을 극복 중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반면에 후자인 을사늑약과 관련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기억을 한쪽에 치워놓고 망각하려 한다는 느낌조차 들 정도이다.

사실 1905년 시점에 열강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은 국제질서의 냉혹한 연관성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더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병과 계몽운동가들은 여기에서 빠져나오려 무척 노력했다. 안중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바꾸기 위해 가장 치열하고 선도적으로 맞서 싸운 위인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종교 신념과 무장투쟁의 거리 두기 ‘뚜렷’

을사늑약은 안중근의 삶을 확 바꿔놓았다. 그는 1906년 봄 가솔을 거느리고 고향인 황해도 해주군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학교 두 개를 세우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안중근이 고향을 떠난 데는 청계성당 빌렘 신부와의 갈등도 한 이유였다. 안중근은 종교적인 문제의 경우 빌렘 신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한국의 애국심에 관한 문제’에서는 빌렘 신부가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빌렘 신부는 안중근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서, ‘정치적 선동’을 계속한다면 둘 중 한 사람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보았다(<빌렘 신부, 안중근을 기록하다>).

반일적인 언행을 포기할 수 없어 고향을 떠난 안중근의 삶은 1907년에 또 한 차례 크게 변했다. 교지(敎旨)와 항일활동을 구분해가던 그의 삶의 궤적이 7월 광무황제의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을 계기로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보기에 이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지 않으면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미7조약의 ‘성립 당시부터’ 이토를 살해할 작정을 했고, 그렇게 굳은 마음을 품고 있을 때인 8월1일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에 안중근은 서울을 떠나 단신으로 부산·원산·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서 동포를 대상으로 계몽 연설에 열정을 쏟는 동시에 군자금과 의병을 모았다.

살인하지 말라는 다섯 번째 계명과 관련한 종교적 신념을 가다듬은 안중근은, 1908년 7월부터 의병을 거느리고 백두산과 가까운 함경남북도 산악지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가 보기에 위급한 대한제국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적을 치는 일밖에는’ 없었다. 나아가 한 번 의병을 일으키면 끊이지 않고 계속해야 세계열강의 공론도 얻고 독립할 희망도 보였다. 그러는 도중에 큰 기회가 오면 이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가 말하는 큰 기회란 1908년 시점에서 5년 정도 사이에 예측되는 러시아, 청, 미국 등 3국과 일본 간의 전쟁을 가리킨다. 의병 입장에서 이 전쟁을 결정적인 대외정세로 활용해 독립할 기회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안중근의 계몽 활동과 의병 투쟁에선 당시 싹트고 있던 독립전쟁론의 일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전쟁이란 말은 미국 독립운동 세력이 영국과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한 역사를 한마디로 압축한 용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가 군대해산 직후 발행한 ‘공립신보’ 사설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의 회원으로 1908년 겨울에는 연해주 일대에서 계몽 사업을 벌였고 1909년 봄·여름에는 의병 투쟁에 참가했다.

이즈음 두만강과 인접한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에 거주하던 의병 지도자들은 정미7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인민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국가 관념을 갖게 되면서 주권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고 보았다.

대중의 열망에 호응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약 5만명의 사상자를 감수하면서도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세력을 형성할 수만 있으면 대중이 여기에 호응해 ‘독립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면 열강의 간섭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거칠지만 선도적 중심 잡기

안중근의 독립전쟁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안중근은 10월30일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일본 측의 첫 취조를 받았다. 이때 그가 밝힌 이토를 ‘살해’한 15가지 이유 가운데 동양평화를 교란한 죄는 첫 번째가 아니라 열두 번째였다(피의자 제1회 신문조서). 안중근이 말한 동양평화란 중국, 일본, 한국, 시암, 버마 모두가 자주독립한 상태였다. 그는 이들 가운데 한 국가라도 자주독립이 되지 않으면 동양평화라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자신에게 종속된 수직적인 연대를 전제로 했던 일본의 동양평화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었다. 안중근은 이후 검찰관 또는 통감부 파견 경찰관의 심문을 20여차례 받는 과정에서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더욱 간단명료하게 진술했다.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한일 간을 이간시키므로”라고(제5회 공판시말서).

그래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한 게 개인 자격이 아니고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자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낱 살인범이 아니고 전쟁에 나갔다가 적군의 포로가 된 사람과 마찬가지로 만국공법에 근거해 처분하도록 요구했다. 안중근의 포로 대우 요구는 독립전쟁을 수행한 의병의 신분을 인정받으려는 투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의병 투쟁을 수행했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천주교의 다섯 번째 계명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이란 유묵은 법정에서 안중근이 획득하려 한 이러한 인정 투쟁의 방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제도 안중근을 신문하면서 맨 마지막 질문에서까지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검찰관은 마지막 신문인 제10회 신문 때 이토를 저격한 행위가 인도와 교지에 반하는 행위가 아니었냐고 파고들었다. 이에 안중근은 천주교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죄악이지만,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렇다고 안중근의 종교적 믿음이 동요했다고 볼 수도 없다. 스스로 성금요일인 3월25일을 사형일로 요청했고, 일제가 이를 거부하고 3월26일로 날짜를 확정하자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나서 결연히 일어나 스스로 교수대로 가서’ 섰을 정도였다.

안중근이 죽은 후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는 그를 냉대했다. 그는 1993년에 와서야 신자로 사실상 복권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인 사회 일반은 의거 때부터 그를 매우 존경했다. 사형을 당한 지 3주 만인 4월15일에 출간된 <근세역사>라는 책에 그의 전기(傳記)가 수록될 정도였다. 책에는 안중근이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그에 관한 전기는 1910년대에만 여섯 권이 간행되었다. 출판된 곳도 다양했다. 국내는 물론 상하이, 호놀룰루, 블라디보스토크, 서간도에서 발행되었다. 그에 관한 달력과 사진엽서도 나왔다. 1945년 독립 때까지 이처럼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는 없었다.

그중 박은식의 <안중근전>은 1914년쯤 상하이에서 간행되었다. 박은식은 책 서문에서 안중근을 지사, 열협(烈俠) 등 어떤 말로도 다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안광(眼光)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어찌 한국만을 위하여 복수한 것이라고만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글을 끝맺었다. 박은식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세계평화 사상의 일부가 되는데 아무런 손색이 없음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안중근의 선도적 활약은 계몽 활동과 의병 투쟁을 분절하지 않고 둘 다를 몸소 실천으로 연계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또 연해주와 북간도에서 의병을 결집, 국내로 진격해 북부 지역에 거점을 구축하고 일본군과 직접 싸우면서도 대외정세를 고려하는 독립전쟁 전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게다가 하얼빈 의거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몰락으로 흐트러진 민족의식과 꺾여버린 항일의지를 바로 세우는 버팀목이자 중추였다. 이처럼 안중근의 선도적인 선택은 이제 막 싹트는 행동과 실천이었으므로 거칠 수도 있었지만, ‘대한독립’의 의미가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행하는 데 따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정수(精髓)들이었다.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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