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이 유명해진 데는 아무래도 ‘논두렁 시계’ 보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논두렁 시계는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때부터 논두렁은 뭔가 ‘비루함’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왕왕 등장한다. 예컨대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의 ‘논두렁 잔디’ 논란이 그렇다.
사실, 논두렁은 죄가 없다. 논두렁은 논과 논 사이의 경계이자 논에 물이 잘 머무를 수 있도록 지켜주는 ‘댐(둑)’ 역할을 한다. 논두렁을 빼놓고 쌀농사를 논할 수 없다. 바지런한 농부들은 농사에 앞서 정성껏 논두렁을 손보고 다진다. 어쩌다 논두렁에 구렁이가 똬리를 틀거나, 드렁허리가 요란하게 구멍을 내놓기라도 한다면 큰일난다. 논두렁을 잘 만들어주는 기계도 있다.
어쩌다 쌀이 남아도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식량이 ‘안보’가 된 지금 쌀농사는 여전히 중요하다. 세종께선 “밥이 백성의 하늘”이라 하셨다. 따르자면 농사도 물론이거니와 논두렁 역시 ‘신성’한 존재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농촌에 얼마의 예산을 쓰든 아깝지 않다.
당최 논두렁이 비루함을 뜻하는 언어로 차용된 이유를 모르겠다. 적절한 비유나 묘사인가? 그렇지도 않다. 논두렁 시계나 논두렁 잔디가 쓰인 맥락을 보면 ‘논두렁’이 주는 어감에서 뭔가 ‘수렁’ 혹은 ‘개흙(펄)’과 유사한 의미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다.
열거했듯이 논두렁은 둑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질지도, 끈적이지도 않는다. 논두렁을 한 번이라도 밟아본 이라면 금방 알 수 있다. 겨울을 제외하곤 그다지 듬성듬성하지도 않다. 딱 봐도 비루하지 않단 말이다. 외려 잡풀이 빼곡히 자라 베어줘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제법 튼튼해 발길질 몇번에 크게 파이거나 무너지지도 않는다.
본래 꾀병을 부릴 때 지르는 비명이 더 큰 법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묘사나 비유가 있다면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논두렁 시계가 결국 특정인을 망신주고 겁박하기 위해 지어낸 단어였듯이 말이다. 비열한 수작에 논두렁을 가져다씀으로써 저들은 농사와 농민 역시 모욕했다.
논두렁 잔디를 보자. 화살은 경기장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관리공단으로 쏟아지고 있다. 경기장을 임대하는 입장에서 잔디 관리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어쩌다 비유조차 적절치 않은 ‘논두렁 잔디’가 되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겨울은 추웠다. 잔디는 경기장에 잘 뿌리내리는 생육과정이 중요한데, 특히 2월은 18년 만에 이례적인 강추위가 몰아쳤다. 기상청 통계를 보면 2월 서울의 평균기온은 영하 1.2도로 평년 대비 1.9도 낮았다.
가뜩이나 겨울철 잔디 관리가 어려운데 프로축구연맹은 외부 일정병행 등을 이유로 정규리그 개막전을 예년보다 앞당겼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올해 첫 홈경기는 2월22일에 열렸다. 이는 역대 가장 이른 개막이었으며, 지난해(3월10일)보다는 보름 이상 빨랐다. 공단 측은 일정이 앞당겨지자 잔디 관리 문제를 들어 연맹 측에 개막을 늦춰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막전이 있던 당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영하 6도를 기록했다. 두번째 홈경기가 열리던 3월10일에는 새벽에 눈이 내렸다. 오후 들어 잔디 표면은 햇살을 받아 기온이 올랐지만, 한 뼘 아래 토양은 꽁꽁 언 상태였다. ‘논두렁 잔디’는 그 결과물이다.
모든 멍에를 공단이 지는 건 공평치 않다. 연맹도 책임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해외 사례를 보면 축구협회나 연맹차원에서 잔디 관련 연구와 기술개발에 적극적이다. 마냥 관리가 잘된 경기장을 바라선 안 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공공의 자산이기도 하다. 사용료를 낸다 해서 막 써도 되는 건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축구만을 위한 존재 역시 아니다. 프로축구 경기만 열어선 경기장 1년 관리비를 충당하기도 어렵다. 때때로 콘서트도 열고, 행사도 열어야 한다. 이것이 시민들이 낸 소중한 세금을 절약하는 길이고, 보다 많은 이들이 경기장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시설관리공단도 보다 책임 있게 잔디 관리에 나서야 한다. 연내 인공채광기 등 전문장비 도입, 관리 인력 확충, 전문 자문위원회 운영 등 약속한 대책들이 차질없이 시행되어야 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 국민의 환희가 담긴 ‘2002년 월드컵’을 상징하는 곳이다. 더 이상 관리부실 문제로 망신을 자초하지 않길 바란다.
아 그리고, 이제 ‘논두렁’은 좀 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