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AI, 반도체, 식량안보

2024-07-04

세계 경제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첨예한 갈등은 4차산업혁명의 핵심, 인공지능(AI)과 반도체에서 표면화되고 있다. 중국의 거침없는 과학기술 굴기 행보에, 미국은 2022년 10월 자국 기업의 첨단 AI 반도체를 중국이 확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한 데 이어 2023년 10월에는 저사양 AI 반도체에 대해서도 대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기준을 추가했다. 최근엔 독점 또는 비공개 일부 AI 모델과 AI용 반도체 기술에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규제 추진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미국이 기술 격차에 기반한 확실한 힘의 우위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열세인 중국은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중국은 천문학적인 지원금을 쏟아부으며 기술 자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6월 중국의 ‘식량안보보장법’ 시행은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식량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해온 중국은 AI·반도체 규제 장벽에 막혀 쓴맛을 본 후 식량안보의 ‘자립자강’이 절실하다는 위기감에 2012년 ‘식량법’ 초안 공개 후 10년 넘게 끌어오던 식량안보 법제화를 서둘러 매듭지은 것으로 풀이된다. 법률은 ‘곡물 기본자급, 식용곡물 완전자급’을 위한 경지 보호, 식량 생산, 식량 비축, 식량 유통 등의 규정을 담고 있다. 세부적으로 농지 ‘총량 보전’과 ‘질적 보호’ 의무까지 명문화했다. 곡물 수출 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위기 심화 등 식량안보 이슈 부상과 미국의 무역 제재 확대에 대응해 ‘자국 위주, 국내 기반, 생산능력 확보’를 통해 중국의 ‘밥그릇’만큼은 스스로 손에 쥐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이미 중국은 2007년 세계 식량위기 이후 안정적인 식량공급 없이는 존립이 어렵다고 보고 오랜 기간 식량안보의 밑그림을 그려왔다. 중국 당정은 ‘중앙 1호 문건’을 통해 매년 식량안보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은 주요 회의 때마다 경작지를 넓히고 생산력을 높일 것을 강조해왔다.

산업의 쌀이라 할 반도체와 AI가 미래 먹거리라면 식량안보는 그 미래를 뒷받침할 근간이다. AI와 반도체 기술력 확보가 산업안보의 척도라면 식량안보는 나라의 유지 존속과 직결되는, 국가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핵심 동력이다. 중국의 최근 행보에는 이같은 함의가 담겨 있다. 일본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부활을 위해 대만의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기업 신설 라인 유치에 주력하는 한편 ‘식료·농업·농촌 기본법’ 개정을 통해 식량안보를 위한 자국 생산 확대에 안간힘을 쏟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요국 모두 한결같은 움직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 역시 AI와 반도체 산업 육성에는 범정부적인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식량안보는 여전히 덩그러니 의지 목표만 내걸고 있다. 2022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조사의 ‘식량안보 및 관련 정책 이행력’ 지표 0점이 그 실상을 말해준다. 빈약한 식량자급률과 곡물자급률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데도 식량 생산기반인 농지의 전용 시도는 그칠 줄 모른다.

최근 10년간 사라진 농지가 18만㏊에 달한다. 식량자급률 82.6%(2020년 추정치)의 중국이 농지 보전에 방점을 찍고 ‘완전자급’을 부르짖는 마당에, 우리는 50%도 안되는 식량자급률에도 줄기차게 농지를 줄여가는 현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농지 감소는 필연적으로 생산 약화를 부른다. 그 간극은 결국 수입 농산물로 채워진다. 농지 없는 식량안보는 허구다.

이경석 융합콘텐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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