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카(Mecca)는 현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에 있는 도시로 매년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성지순례(하즈, Hajj)를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중심이자 고대부터 다양한 부족과 종교가 공존하던 지역이었던 아라비아반도. 신(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무함마드는 청년 시절부터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메카 상인 사회는 여러 부족과 혈연관계, 그리고 상업적 신뢰에 기반해 운영되었다. 무함마드는 신뢰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 거짓 없이 상거래에 임했고 타인의 재산을 정직하게 다루었으며, 신의를 중시하는 품성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 아민(정직한 자)'이라 불렀고, 이는 단순한 별명이 아닌 그가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표였다.
메카의 큰손, 하디자와의 만남

이러한 삶의 태도는 메카의 부유한 여성 상인, ‘하디자’의 눈에 띄게 되면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하디자(خديجة, Khadijah bint Khuwaylid, 하디자 빈트 쿠와일리드)는 6세기 아라비아 메카에서 존경받는 여성이었는데,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감안하면 여성으로서 존경받았다는 기록은 하디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하디자도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메카의 유력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출신이었다. 쿠라이쉬는 아라비아반도 메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상위 부족으로, 메카의 중심 성소인 카아바 신전(Kaaba)을 관리하고, 상업과 순례 경제의 핵심을 쥐고 있던 지배 세력이었다. 물론, 당시 쿠라이쉬는 단일 가문이 아니라 여러 하위 가문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무함마드는 쿠라이쉬 부족 내에서도 하심 가문(Banu Hashim), 하디자는 아사드 가문(Banu Asad) 출신이었다.
부모 없이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무함마드와 달리 하디자는 다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 쿠와일리드(Khuwaylid)는 당시 메카 상업계에서 손꼽히는 유력 상인이었다. 하디자는 아버지의 유산과 자신의 능력으로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자수성가했다. 총명하고 결단력이 뛰어났던 하디자는 두 번의 결혼과 사별을 겪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거대한 무역 사업을 직접 경영하며 아라비아 전역에 영향력을 펼쳤다. 특히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이 고용한 남성들을 직접 관리하고, 전략적으로 교역 루트를 확장해 나갔다. 단순 자산가가 아닌 메카 상업계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하디자는 ‘타히라(Al-Tahira, 순결한 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을 정도로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함마드를 주목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홀로 무역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해외 교역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상인을 찾고 있었는데, 이때 무함마드에 대한 평판을 듣게 된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에게 시리아로 떠나는 무역단을 맡겼고 무함마드는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한다. 당시 해당 무역 업무를 함께 수행하던 하디자의 하인 메이사라(Maysara)는 무함마드의 행동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했고, 돌아오는 길에 하디자에게 그가 얼마나 겸손하며 뛰어난 사람인지 자세히 보고했다고 한다.

하디자는 '천상의 여인' 중 하나로 간주된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에게 주저 없이 청혼했다. 외모나 출신 때문이 아니라, 진실함,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인격’ 때문이었다. 당시 무함마드는 25세, 하디자는 40세였다. 이 결혼은 당시 메카 사회에서 보기 드문 방식이었다. 15살의 나이 차이와 여성의 프러포즈는 당시에 없던 파격적인 행보였다. 두 사람은 하디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5년간 깊은 유대 속에 살아간다. 이들의 혼인은 당시 메카 사회에서 정치적, 상업적 연합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무함마드가 메카 사회 안팎에서 신뢰받는 인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결혼 이후 무함마드는 생계의 압박에서 벗어난다. 이때부터 주변 사회와 인간의 삶,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하디자의 재력도 무함마드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무함마드 내면의 고민과 신앙적 각성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동반자였다. 실제로 무함마드가 훗날 신의 계시를 받았을 때, 처음으로 그의 말을 믿고 지지한 사람도 하디자였다. 결혼은 무함마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전환점이었으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다.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메카에 있는 카아바 신전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 중심 상업도시인 메카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었지만, 사회는 심각한 도덕적 타락과 불의로 얼룩져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방치, 부족 간의 끝없는 전쟁과 우상 숭배는 당시 사회의 일상이었다. 메카 중심부에 있던 신전인 카아바(Kaaba)는 본래 유대인의 조상이라 알려진 아브라함과 그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세운 유일신의 성소로 전해지지만, 이 시기에는 수많은 부족신과 우상들로 채워져 상업적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종교는 상업의 수단으로 변했고, 정의는 돈과 권력 앞에 무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사회적 불의와 인간의 탐욕, 영적 공허함에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그는 메카 외곽에 있는 ‘히라 산’에 올라가 동굴 속에서 혼자 기도하고 명상하곤 했다. 당시 아라비아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도 하니프(Hanif)라는 무종파 유일신 신앙 전통이 존재했다. ‘하니프’란 말은 아랍어와 고대 아랍어에서 ‘곧은 사람’, ‘진리를 따르는 자’를 의미한다. 유대교 경전,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한 자를 가리킨다. 실제로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서도 아브라함은 "진정한 하니프, 우상을 멀리하고 유일신을 섬긴 자"로 반복해서 언급된다(꾸란 3:67). 즉, 이슬람 이전에도 ‘우상 숭배는 잘못이며, 오직 한 분의 신만을 섬겨야 한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함마드는 이 하니프들의 정신에 공감하고 그 전통을 잇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하니프들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와 달리 어떠한 경전이나 제도화된 종교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흠모하며, 세속적 욕망이나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순결한 신앙’을 추구했다. 이들은 메카 사회에서 소수였지만, 정직함과 경건함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일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와도 많은 면에서 맞닿아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의 등장은 돌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혁명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영적 흐름 속에서 ‘계시’라는 형태로 정점에 도달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함마드는 단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잊힌 유일신 신앙을 다시 일깨운 자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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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해(610년, 아라비아 달력으로 라마단 기간 중 어느 날), 무함마드는 히라 동굴에서 깊은 명상 중 대천사 지브릴(Gabriel, 가브리엘)을 통해 생애 첫 계시를 받는다. 흔히 라마단은 오늘날 이슬람의 금식 성월로 알려져 있지만, 이슬람이 형성되기 전에도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영적 정화를 위한 명상 시기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자연과 신에 대해 묵상했다. 무함마드도 이 전통을 따랐다. 무함마드가 계시받은 히라 동굴(غار حراء, Ghar Hira)은 메카의 북동쪽 약 5km 지점에 있는 누르 산(Jabal al-Nur, '빛의 산'이라는 뜻)에 위치한 작은 동굴이다. 해발 약 600m 높이의 산 중턱에 위치한 히라 동굴은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가야 했고, 좁고 어두운 동굴이었지만 메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있었고, 혼잡하고 소음이 가득한 도심을 벗어난 외부와의 단절된 공간으로서 명상과 신께 기도하기에 매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 받는 무함마드
히라 동굴에서 명상 중이던 무함마드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그 천사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가브리엘(Gabriel)’로 알려진 대천사였지만, 아랍어로는 ‘지브릴(Jibril)’이라 불린다. 아랍어의 발음 체계에 맞춰 표현된 이름이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읽어라!(Iqra!)”. 단순히 ‘책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다. 'Iqra'는 ‘외워라’, ‘선포하라’, ‘전달하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지브릴은 이어서, “사람을 핏덩이에서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는 계시를 전했다. 이것이 훗날 이슬람 경전 '꾸란(Qur’an)'의 첫 번째 계시로 기록된다. ‘꾸란’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읽어라(Iqra)”에서 비롯되었다. ‘꾸란’은 ‘읽히는 것’, ‘암송되는 것’이라는 뜻의 아랍어 ‘카라아(Qara’a)’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읽히고 외워지며 전해지는 성전을 의미한다.
무함마드는 천사의 외침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몸을 떨며 집으로 돌아온 그를 아내 하디자가 따뜻하게 감싸며 위로했다. 하디자는 무함마드를 조카뻘 되는 친척인 와라카 이븐 나우팔(Waraqah ibn Nawfal)에게 데려간다. 와라카는 기독교에서 파생된 유일신 신앙을 따르던 경건한 인물로 예언자적 전통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받은 계시가 유대교와 기독교 예언자들에게 전해졌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임을 확신했다. 무함마드는 새로운 예언자였고, 이제 그는 신의 뜻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무함마드는 이후 23년에 걸쳐 천사 지브릴을 통해 계시받는다. 이 계시들은 암송되어 전해졌고, 무함마드 제자들과 후대의 신자들이 이를 기록하고 정리해 오늘날의 ‘꾸란’을 이루게 된다. 이 계시의 핵심은 단순하다. 오직 한 분 신(알라)만을 섬기고, 불의와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정의롭게 살라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조금씩 주변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를 따르는 신자도 늘어났다. 이들은 움마(Ummah)라고 불리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다. 움마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닌, 정의와 형제애, 상호 부조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였다. 초기 움마는 탄압과 조롱을 견뎌야 했지만, 결국 무함마드와 그의 제자들은 점차 믿음과 그들의 삶으로 공동체를 성장시켜 나갔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 꾸물
기사 : BR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