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수전노’ 김윤식, 투명하고 차가운 향기가 그립다

2024-09-27

고 김윤식 교수 ‘혼신의 글쓰기’ 특별전-제자 서영채 교수 기고

‘한국 문학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200여 권의 저서를 남기고 6년 전 타계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돌아보는 특별전 ‘혼신의 글쓰기: 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립니다. 김 교수의 제자이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서영채 서울대 인문대학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가 회고전에 부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1. 달변은 아닌데 훌륭한 강사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2013년 10월 26일 와세다대 학회장에서의 일이다. 기조 강연에 나선 그가 칠판에 1919년 3월 29일이라는 날짜를 적었다. 기미년 3월인데 1일이 아니라 29일? 잠시의 침묵 뒤에 그가 말했다. 이날은 개기일식 관측 실험이 있던 날이라고, 천문학자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관측을 통해 증명한 날이라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조금 과장하면 한방 맞은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그날 그 자리는 한국과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학회 자리였던 까닭이다.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그런 경험은 내겐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기를 감추느라, 아마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달변은 아닌데 훌륭한 강사이고, 이상한 문체를 가지고 있는데 탁월한 저술가이다. 말이건 문장이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데 지나고 나면 기준이 되는 사람이다. 학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물론 그가 매우 예외적인 저술가라 함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가 쓴 200여 권의 책은 분량 자체로 압도적이다. 평균 잡아 40년 동안 1년에 5권씩 써야 가능한 숫자이다. 위중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쓰고 발표했다. 쓰는 사람으로서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태도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굉장하다고 말하는 것도 촌스럽다. 글을 쓰는 게 업인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면 당연하달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가 써두고 간 200여 권의 책더미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매우 독특한 향기로 다가온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패한 헤겔주의자’의 향기, 투명하고 차가운 향기이다.

#2. 고리타분한 사제 구분 없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문학사가이자 동시에 현장비평가였다. 문학사가로서 그는 자료를 찾아 헤매 다녔고, 비평가로서 그는 나날이 쌓여가는 문학작품들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 결과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같은 책을 썼고, 30여 권의 월평집을 남겼다. 그는 평생 갈력으로 기계처럼 그 일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한 나라의 문학사가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나라의 문학사를 쓰는 것이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연구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한 대상은 문학사가 아니라 평전들이다. 문학사가로서 그 앞에 놓여 있던 것은, 일제 강점기를 포함하여 대략 50여 년 동안에 생산된 문학 작품들이었다. 멀리 넓게 헤엄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그는 깊이 잠수했다. 그의 대표작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비롯하여, 염상섭, 김동인, 이상, 임화, 안수길, 김동리, 백철 등을 대상으로 한 평전 시리즈가 그 결과물이다.

그가 평전 시리즈에서 잡아올린 것은 작가들의 ‘내면 풍경’이다. 그가 겨냥한 것은 한국 작가의 내면이 아니라, 한국에서 글을 썼던 사람들의 내면이다. 그는 식민사관 극복이 자기 학문의 목표였다고 말하곤 했으나, 근대성을 지향했던 그의 작업은 기존 국학의 정신적 테두리를 넘어서버린다. 그에게서 국문학사는 한국문학사가 되고, 국학은 한국학이자 인문학이 된다. 그에게 문학사란,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로 이어지는 대문자 역사가 아니다. 그에게 역사란 점묘화법 그림과도 같아서, 무수히 많은 편린들이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위계화된 정전들의 체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들의 표정이 있다.

현장비평가로서 그는 30여 권 분량의 단평 쓰기를 했다. 현장에서 생산되는 단편을 읽고 월평을 쓰는 일이 주된 작업이었다. 품이 많이 들지만 모양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는 특히 1990년대 이후 30여 년간 그 작업을 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동구권 몰락이 초래한 세계사적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는, 움직이며 변화하는 세상을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그러나 그의 태도를 설명하기에 이런 정도의 대답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그가 쓴 30권 분량의 월평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가 뭘 하지 않으려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는 비평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려 하지 않았다. 평가를 매개로 비평적 토론의 장이 만들어지고 그 결과로 당대의 대표작과 그것들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는 그런 일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썼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읽은 자취를 남겼을 뿐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읽기란 감상과 평가를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찾아내고자 함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탐구하는 정신이었고, 또한 그 자신이 불안에 시달리는 영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낮추지 않았다. 그는 상아탑이나 진리의 전당 같은 것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자기 자신이 배추장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이 단순한 냉소나 위악이 아님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자기를 가르친 사람이라 해서 특별히 높이지 않았고,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지적으로 하대하지 않았다. 그가 무시했던 사람은 애어른 가릴 것 없이 기대 눈높이가 낮은 사람들이었다. 눈이 낮은데 권위적인/순종적인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는 경멸을 퍼부었다. 불친절한 교수자의 강의실인데도 냉정한 열기로 가득 차곤 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고리타분한 단어가 들어설 여지가 없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3. ‘비평가 나부랭이’ 자신에 가혹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도 공개적으로 가혹했다. 평생 남이 지은 글이나 읽는 ‘비평가 나부랭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곤 했다. 윤달에 태어난 자신을 잉여 인간 같은 존재로 취급하곤 했다. 그가 퇴적한 글과 책의 거대함에 대해 대단하다는 식의 언사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그에게서 내가 보았던 것은 삶의 잉여들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가 선택한 것이 문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시간의 수전노였다. 사람들 속에서 쓰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그는 자신을 ‘실패한 헤겔주의자’로 칭했으나, 그 말은 진짜 헤겔주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꺼이 실패 속으로 입장하여 실패 속에 머물고 있을 때에만 진짜 헤겔주의자, 진짜 문학이 생겨난다. 그래서 그는 퇴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그의 비틀어진 입매에서 나오는 말이, 인간 만세, 문학 최고, 따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가 떠난 지 이제 6년이다. 에딩턴이 아프리카의 한 섬에서 개기일식 관측실험을 했던 정확한 날짜는 1919년 3월 29일이 아니라 5월 29일이다. 나는 지금 11년 전 학회장 사진 속에서 칠판의 필적과 그의 흙빛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개기일식 그림과 날짜가 있고, 그 옆에는 K.포퍼의 이름이 잘못된 철자로 써져 있다. 그런 따위가 무슨 아랑곳이랴. 그의 낯빛에 어려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안타까울 뿐이다.

마당에 떨어진 푸른 감은 열흘이면 참혹한 잿빛으로 쪼그라든다. 장미가 사라지면 향기도 사라진다. 내가 사는 세상의 더러운 냄새가 진동할 때마다 나는 투명하고 차가운 그의 향기를 그리워한다. 종당에는 향기의 기억도 사라지고 텅빈 이름만 남게 될 것이다. 짧은 글이나마 적어두어 그의 향기를 추억한다.

서영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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