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것

2024-02-23

양두영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앞선 글들에서 필자는 참행복은 ‘존재’에 달려있음을, 그래서 ‘존재의 변화’가 관건임을 종종 언급했다. 한데 막상 ‘무엇이’ 그런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지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오늘은 그것을 다뤄본다.

동화 ‘미운오리새끼’의 주인공은 백조다. 그는 집오리들 틈에서 나고 자라면서 자신을 하늘을 날지 못하는 집오리로 믿고 살게 된다. 그래서 날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백조임을 알게 된다. 처음엔 믿지 못했지만 자신이 백조임을 굳게 믿자 비로소 하늘을 날게 된다.

네 발로 기던 아기가 두 발로 걷기까지 2천번 넘게 넘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2천번 넘게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아기는 무수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보고 ‘저분이 내 부모가 맞구나. 내가 저분의 자식이 맞구나. 그러면 나도 저분들처럼 두 발로 설 수 있겠구나’ 믿게 된다. 자신을 향한 부모의 믿음을 보고 자신이 인간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의 자식이 아니라 두 발로 서는 인간의 자식임을 믿게 된다. 이 믿음이 그를 두 발로 걷게 만든다.

필자는 이전 글들에서 천주교에서는 세례 때 결정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데 아무리 세례로 새로 태어나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미운오리새끼’의 주인공이 큰 날개를 갖고 태어났어도 자신이 백조임을 믿지 않았을 때에는 날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피땀 흘려 노동하고 아이는 그것을 먹고 큰다. 입에 들어가는 것은 밥이지만 실제로 먹는 건 부모의 피땀이다. 아이는 부모의 피땀을 먹으며 ‘내가 정말 저분들의 자녀구나’ 믿게 된다. 부모의 피땀이 그에게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비로소 그를 인간이 ‘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성체를 먹는다. 성체는 예수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주교인들은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참으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아이가 부모의 피땀을 먹듯 천주교인들은 성체를 먹고 자란다. 이 참된 양식이 새 삶을 가능케 한다. 이 과분한 사랑의 양식(예수의 자기증여)을 먹으며 자신이 틀림없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된다. 이 참된 양식이 믿음을 자라게 하고, 그 믿음이 그를 하늘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부모의 피땀을 먹고 자란(기억하는) 자녀가 부모를 닮듯 결국 예수를 닮게 된다. 진심으로 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을 집오리의 자녀라 믿는 이는 땅을 기지만, 자신이 백조의 자녀라 믿는 이는 하늘을 사랑하게 된다. ‘추구’는 ‘존재’에 달렸기 때문이다. 존재가 달라지면 추구하는 바도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 없어 하는 청년 신자에게 필자는 말한다. “내게 성체를 주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기억하자. 하느님이 믿는 나를 믿어라.”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건 신이 우릴 믿는다는 것이다. 신이 믿는다면 그건 ‘된다’는 것이다. 남은 건 내가 그것을 믿느냐뿐이다. “중요한 건 자네가 하느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아니라네.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으신다는 사실이지.”(토마시 할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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