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우연한 기회로 예문아트홀을 찾았다. 신복로터리(였던 곳)에서 울산대학교 가는 방향으로 조금 진입하다가 우회전해서 오르막길을 오르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어딘가의 건물 2층이다. 처음 가본 골목이고, 그렇게 다닥다닥 건물들이 붙어 있다니. 그런데 이 공연장이 있는 건물은 좁은 출입구로 들어서면 꽤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만족스러운 주차장이다.
좁은 계단을 올라갈 때의 느낌은 뭐랄까, 동숭동 여기저기에 나 있는 소극장 입구의 가파르면서도 향수 어린 계단 냄새랄까, 이미지랄까, 기분이랄까, 분위기랄까. 불편하면서도 편하고, 익숙하고, 정감이 있다.
일요일에 불쑥 들어섰는데 다행히도 관장이 있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나와 있던 거라나.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잠시 얼굴을 보고 며칠 뒤 두왕동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것은 자기를 풀뿌리, 작은 시냇물 정도로 낮추는 겸손에 감동이 일었고,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을 다른 사람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에 감탄이 일었고, 부인과 두 딸아이가 모두 음악인이라는 사실이 멋졌다.
겉보기와 다르게 공간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100석의 객석과 공연, 북콘서트, 상영, 기타 행사들이 가능한 공간이다. 프로필 사진과 영상 촬영이 가능한 곳이고, 여러 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업라이트 피아노, 방음 설치가 된 크고 작은 공간들. 고즈넉한 복도와 작은 응접실. 번잡하기 짝없는 무거동의 어느 좁은 골목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을 줄이야.
영화 작업 때문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살면서 밀려 있는 기사들로 만난 지 거의 한 달 만에 소개하게 됐다.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공연을 계속 이어간다. 그의 노력과 마음과 의지와 실천이 더 많은 이에게 소개되고 동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촬영이 끝나고 한숨 돌릴 때쯤이면 예문아트홀의 공연과 이승욱 관장의 활동을 더 많이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Q. 소개 부탁한다.
울산 남구 무거동에 위치한 100석 규모의 소공연장을 운영하는 이승욱이다. 반갑다.
Q. 공연장이라고 했는데, 어떤 장소인지 설명해달라.
합창 지휘를 전공했다. 음악회를 많이 했었는데, 울산이 관에서 운영하는 공연장이 그렇게 넉넉지가 않다. 100석 규모의 공연장이 필요하다는 걸 많이 느껴서 운영하게 됐다.
Q. 합창 지휘자라…. 어떤 형식으로 운영해 왔나?
젊을 때부터 합창에 관심이 늘 있었다. 아마추어 때부터 교회 성가대라든지, 지휘를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부족함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합창 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중앙대학교 윤학원 교수가 있는 학교에서 석사를 했다. 거기서 어린이 합창도 배우고 성인 합창도 배우게 돼서 지금까지 어린이 합창단도 10여 년 했었고. 지금까지 아마추어 합창단도 하고 있고. 전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합창단도 20여 년 운영하고 있다.
Q. 관에서 운영하는 공연 공간 이외에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거나 필요성을 느꼈나?
다수가 최고 선호하는 공연장이 울산 문화예술회관이거든. 거기에 대공연장 1,500석 규모. 그다음에 소공연장이 500석 규모. 그런데 소공연장도 독창이라든지 작은 앙상블이라든지 이런 소규모의 팀이나 독주자들이 공연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대관의 문턱도 높다. 주로 심사를 받아서 대관을 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가볍게 연주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나도 공연장을 하기 전에는, 작은 규모로 할 때는 카페 이런 데도 피아노가 비치된 공간이 있다. 그런 데서 연주를 해 보니까 거기는 공연에 필요한 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소음도 그렇고. 또 집중할 수 있는 암막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이 돼 있지 않아서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다.
그러다가 20여 년 운영하던, 무거동에 음악 학원이 있었다. 그 학원을 정리해서 내가 하고 싶은 공연장을 만들게 되었다.
Q. 대공연장에 오는 관객들과 소공연장에 오는 관객들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합창도 클래식 쪽이라고 봐야 하겠지. 대부분 사람은 클래식은 좀 어렵다 생각하고, 특히 교향악단이나 기악 연주는 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공연장 문턱을, 평생 예술회관을 안 가본 이들도 꽤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그런 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나도 늘 지금까지 연주해 오면서 관객 동원이라 그럴까, 관객 유치가 참 어렵거든. 지역에서, 예를 들면 시냇물이 모여서 강으로 흘러가듯이 그 지역의 문화를 정말 지역 사람들과 같이 향유하면서 이분들이 클래식을 가까운 데서 접하고, 그다음에 콘체르토라든지 교향악단, 아니면 합창단 연주를 한번 보고 싶다든지, 이렇게 해서 그다음 단계로 예술회관으로 가게 하는 그런, 뭐랄까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돼서 작은 공연장을 시작하게 됐다.
Q. 일반 대중이 고급 예술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역할을 선택하게 된 건데, 민간 풀뿌리 조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개인이 운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나?
너무 힘들지. 이제 울산에도 울산문화관광재단이 생겨서 기대를 많이 하고는 있다. 그러나 요즘 경제가 어렵지 않나. 특히 예술인들이 안정된 직업을 갖기가 참 어려운 실정이거든. 예를 들면 시립 예술단에 소속된 합창단이라든지 오케스트라라든지 무용단, 이런 데는 일정한 급여를 받고 보장이 돼 있지만, 일반적인 연주자들은 주로 프리랜서라고 이야기하는데, 학교에 방과 후 수업 정도 일정하게 일할 수 있는 거. 나머지는 정말 이벤트도 많이 없고.
요즘은 전문가로서 활동하기가 참 어려운 실정이다 보니 자기 스스로 연주를 기획하고 공연하기가 예산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이 어려워하는 것 같다.
예술회관이나 문화재단 이런 데서 공모를 하지만 그 공모를 다 수용할 수 없는. 많은 기초 예술인들이 공모에서 많이 떨어지더라고. 그런 것들이 좀 더 지원돼서 우리 같은 민간 소공연장에서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작은 공연에 지원이 많이 필요한 실정인 것 같다.
Q. 운영하는 공간은 일반 대중과 만나기 위해 홍보가 필요하고 찾아오게 만드는 게 필요할 텐데, 역으로 예문아트홀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소규모로 대중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
울산에서 거리음악회 이런 거 있잖아. 그것도 공모해서 관이 주도하는, 지정된 장소에서 공연하게 만드는데 소정의 비용 정도 지원해 주는 그런 프로그램도 좀 있거든.
예를 들면 우리가 공연 기획하는 게 있다. 학교 같으면 성폭력, 학교 폭력이라든지 요즘 말하는 마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뮤지컬이라든지 이런 이제 음악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런 작품을 만드는 데는 예산도 필요하겠지만, 충분히 그런 작품을 우리가 만들어서 목적에 맞게 음악회를 할 수 있지. 악기도 같이 협업해서 할 수도 있고.
예산만 확보된다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인들, 다양한 예술인들을 어떤 목적에 맞게끔 우리가 구성해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Q. 아까 시냇물로서 꼭 필요한 활동을 함에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게 예산이다. 나도 울산의 콘텐츠 개발을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있지만, (지원을 받기에는) 문턱도 높을뿐더러. 합창이나 이런 것들은 소예산으로 할 수 있지만, 지속적인 연주를 하려면 극이나 이런 쪽으로 가야 되거든. 근데 극이라는 그런 작품은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 않은가. 시간도 필요하고. 오랫동안 공모를 해봤지만 적은 예산에 결국 사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사재를 일부라도 항상 더 투자해서 작품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고 하다 보니까 사실 좀 많이 지쳤지. (풀뿌리 역할이 가져오게 될 효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많이 더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됐지만, 할수록 뭐라고 해야 할까, 힘들어지고. 지금 같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관의 도움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지원이나 이런 것들.
Q. 지원 사업이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서류를 잘 쓰는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혹시 비슷한 이유로 피해를 봤거나 아쉬운 부분이 있었나?
없다고 할 수 없지. 나도 초기에, 참 오래된 이야기지만, 또 옛날엔 더 그랬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아까 말한, 전문 성악인들을 구성해서 처음 시작했을 때가 한 20여 년 전이지. 그때 공모를 했는데 한 3, 4년 계속 떨어졌다. 젊은 예술 단체를 구성해서, 전공자들을 위주로 단체를 꾸몄는데 왜 이렇게 떨어질까? 그때 참 비참해지더라고.
그러다가 어느 해에 당선이 된 거야. 발표가 나오면서 그날 신문을 봤다. 그랬더니 소위 말하는 나눠 먹는다, 이런 그런 말들이 참 많았거든. 그때 공모 심사를 과거에 있었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심사위원들을 대거 영입해서 공정하게 심사했다 하더라고. 정말, 이게 뭐지? 하면서 정말 공정한 심사를 했는가 보다. 그때 우리가 받게 됐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흘러왔지만, 아직도 늘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공모가 끝난 다음에 만나본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개선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Q. 개인적인 얘기로 말씀을 나눠보자. 울산에서 태어났나?
태어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초·중·고·대 다 울산에서 나왔다. 어떻게 보면 (울산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지.
Q. 부인도 울산에서 만났나?
아내는 경주다. 바로 옆 동네.
내가 음악 계통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니 아버지도 피아노를 치는 며느리를 보고 싶다고 해서 우연하지 않게 소개로 만나게 돼서. 우리 가족은 다 음악 관련된 일을 전공하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Q. 무대 뒤편으로 들어가 보니 그랜드 피아노도 두 대나 있고, 딸로 보이는 누군가가 뭔가를 연주하는 모습이 있었다.
큰아이는 작곡을 전공했고, 작은 아이는 성악을 하고 지금 오카리나에 빠져서.
우리 아이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 둘째 아이는 오카리나에 굉장히 재능이 많이 계발돼서 나름 전국적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Q. 아이들이 어떤 장애가 있나?
큰아이는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작은 아이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성악과 오카리니스트로서 최근에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Q. 자폐성 장애인 친구들을 보면 뭔가에 집중하는 데 천재성이 있다고 하는데 따님은 어떤가?
숫자에 대해서는 너무 민감할 정도로 많이 기억하고 있어서 걱정될 정도로. 한 예로, 우리 둘째 아이가 통장을 개설할 때 (첫째 아이가) 옆에 있었다. 한 일주일 후엔가? 어딘가에서 아이의 통장 번호를 적게 될 일이 있었다. 통장을 갖고 있지 않고, 워낙 우리 큰아이가 수에 민감해서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그냥 적더라고.
방송에서도 어떤 분들 그런 이야기 하던데, 이야, 이런 아이들은 숫자나 이런 거 사진 찍듯이 본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가 어떻게 외우는지는 아직도 우리는 알 수 없는데. 하여튼 그 자리에서 계좌번호 그냥 적더라고.
Q. 포토그래피 메모리. 사진 찍듯이.
그런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음악 작곡을 처음에 시켜보니까 좀 부족하고 하지만 그게 또 수하고 연관돼 있다 보니까. 음정이라든지 화음이나 이런 거라든지, 쌓기, 이런 것들이 숫자와 연관되다 보니까 그런 것들을 해내더라고.
그래서 첫째 아이는 작곡을 하게 됐고 둘째 아이는 노래와 오카리나를 하게 됐다.
우리 큰아이의 하나 에피소드라고 할까? 안동대학교 작곡을 했거든. 4학년 때인데. 우리는 (우리 아이가) 자폐라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라는 게 목적이 아니었고 사회생활을 하나의 훈련이다, 생각하고 대학을 보낸 거거든. (울산에서 안동으로) 떨어져서 어떻게 지내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었지, 공부를 잘하고 이런 거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잘 적응하고, 사회생활의 하나의 훈련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4학년 때 전화했다, 교수가. 이 아이의 과제를 도와줍니까? 하더라고. 우린 전혀 도와주는 거 없다. (교수가 우리 아이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 부부는 동시에 베꼈겠지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교수들도 워낙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아닌가? 베끼면 압니다, 그러더라고. 그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는데, 베껴도 이렇게 베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하나도 도와준 게 없는데. 지금도 우리 아이는 어떻게 작곡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Q. 아빠는 지휘, 엄마는 피아노, 첫째 아이는 작곡, 둘째 아이는 노래와 오카리나. 가족 연주단도 가능하겠다.
글쎄. 할 수도 있고. 우리가 부모로서 아는 게 음악이다 보니까, 아이들의 특성이나 이런 것들은 부모가 더 잘 아니까. 다른 쪽도 한 번 시도를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부모가 더 아는 분야로 아이들을 지도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음악 쪽으로 보내게 된 거다.
Q. 교수가 칭찬할 정도면 대단한 재능을 발견했다는 건데, 첫째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길 바라나? 아빠 입장에서.
나야 항상 이 아이가 직업적인 대단한 걸 갖기보다는 음악 속에서, 어쨌든 우리 가족이 같이 음악을 하니까, 그 안에서 자기의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고, 연주할 수 있고, 우리들은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의 바람이다.
Q. 울산저널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한다.
나도 어릴 적부터 울산에 살았고 과거에는 항상 울산을 문화의 불모지다, 산업도시다, 이런 의미에서…. 아, 다시 하자.
울산을 과거에는 항상 공업 도시, 또 문화의 불모지라, 그런 누명을 쓰고 살았던 도시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굉장히 환경 도시로 또 문화의 도시로 많이 탈바꿈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문화의 접근이 참 어려운 거로 다들 이야기하고 있다. 먹는 거라든지 그런 문화들은 굉장히 앞서가고 있는데, 기초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도도 좀 낮고 문화에 대해, 특별히 클래식 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아직 낮아서 마음이 아프다.
나는 무거동에서 소공연장을 하면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고, 그 작은 문화를 공유하고 향유하기를 원하는데 여러분들께서도 지역에 있는 공간이라든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초 예술인들이 많은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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