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대학 캠퍼스와 붙어 있고, 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건널목에 함께 서 있던 20대 남성의 말이 들렸다. “축제에 재학생만 갈 수 있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봐. 지역 주민들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어야지.”
“자기들 행사니 당사자들이 결정하는 게 맞지 않니?” 옆에 있던 어머니가 대꾸했지만, 그는 바로 제 주장을 펼쳤다. 그 주장의 논리보다 내 귀에 박힌 건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명료한 의지를 담은 남성의 태도였다. 응답하는 어머니 말투에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다는 기특한 마음이 커 보였다. 슬쩍 돌아보니 아들 손을 잡은 스킨십과 눈빛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최근 진료실에서 자주 만난 모자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먼저,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무척 친밀하다. 멀끔한 인상의 남자는 말을 잘 하지 않고, 같이 온 어머니가 과거를 설명한다. 보통 5~6년을 거슬러서 “우리 아들이 ○학년 때까지는 참 잘했어요. 특목고도 생각했죠”라고 말하는 영광의 시절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리막을 타서 공부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놓았다. 열심히 학교나 직장은 다니지만 어디든 만족을 못한다. 이건 우울증 때문이라고 자가 진단을 하고 정신건강의학과까지 오게 된다.
본인과 면담을 하다 두 번째 특성을 만난다. 대체로 수동적이면서 저항의 선이 분명하다. “어서 나를 고쳐보시죠”라는 태도로 앉아 있다가 고치면 좋았을 부분을 지적하면 바로 반박한다. “그건 아닌데요. 선생님 생각이 틀렸어요. 제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어 얇지만 단단한 자기애의 갑옷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주변을 원망한다. 가족들의 지원이 모자란 것, 부모가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운이 없던 것, 학교나 친구들도 수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뭔가 문제가 있고 삶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기 문제는 없고 오직 피해자라 여긴다. 무엇보다, 억울한 것이 참 많다.
자기애적 논리로 무장해 감정을 섞어 온 힘을 당해 방어를 한다. 자신의 잘못일 수 있고, 노력이 부족했을 가능성은 단호하게 부정한다. 끼어들 여지가 없으니 치료는 교착 상태로 이어진다. 애써 실천해볼 만한 것을 권하나 생활의 변화는 없다. 우울증이라 오고 있지만, 실은 기대만큼 이루지 못해 생긴 우울한 심리 상태라 치료 약물의 반응도 적다.
여기에 ‘아버지의 무관심’도 한몫한다. 아이는 자라는 과정에서 권위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고개 숙이고, 이해되지 않아도 따르는 경험이다. 언제부터인가 부모 모두 친구 같은 사이가 되기를 선택했고 사랑을 담은 정서만 과잉공급됐다. 결국 자아는 비대해지고, 스트레스 감내력은 허약해진 비대칭 발달이 일어났다. 결국 ‘나는 대단한 사람이어야 해’라는 환상을 안은 채 성인이 됐고, 어떤 성취에도 현실의 나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이 존재하니 내면엔 분노가 있다.
그 환상을 본인도, 부모도 깨고 싶지 않다. 엄마는 간절히 아이의 독립을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갈림길이 오면 보호를 선택한다. 해결책은 현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뼈 때리는 아픔이 오니 강한 반발만 온다.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걸 부인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허세 같아 보이는 희망을 말하나 근거는 빈약하고 실천은 없다. 힘들다고 말하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이런 현상은 같은 20대지만 여성보다 남성에서 두드러지고, 어머니와의 친밀한 관계를 보면 확신이 선다. 그래서 나는 ‘귀한 아들 증후군’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동질감이 느껴지는 이를 보면 호감이 가기 마련이다. 이번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 37.2%가 이준석 후보를 지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