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난 첫 지체장애 1급 교사…"불꽃 같은 아들 삶 기억되길"

2025-03-17

1급 지체 장애인 처음으로 서울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던 고(故) 박성욱(32)씨는 서울 덕수중학교에 재직하던 지난 1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부모 박정주·안선희씨는 가족 세 명의 모교인 서강대에 2000만원을 도서관 발전 기금으로 기부했다. 이들은 지난 14일 중앙일보와 만나 “불꽃처럼 살다 간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뜻깊게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씨는 선천성 장애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학창 시절 공부할 때는 부모님이나 도우미가 옆에서 책장을 넘겨줬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수학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복잡한 수식을 머리로 생각해서 입으로 불러 주면 받아 적었다. 수능 시험도 대필자가 붙어서 치렀다”면서도 “아들이 의지가 워낙 강해서 슬럼프를 겪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일본 후쿠오카 수학여행을 포기하려던 그를 위해 담임 교사는 여행사에 장애인 버스를 요청하고,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짰다. 이런 ‘어른’을 꿈꾼 박씨는 2017학년도 임용시험에 합격해 국어 교사가 됐다. 그는 특수마우스를 입에 물고 파워포인트와 동영상 등 수업 자료를 준비했다. 과목 특성상 긴 지문이 많다 보니 학기 중에는 수업 준비와 시험 출제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박씨의 열정은 대학 생활에서도 많은 성취로 이어졌다. 그는 9학기 동안 국문학·심리학·교육문화(교직)를 전공했다.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을 정도로 공부에 열의가 컸고,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녔다. 이 과정을 매일 함께한 서강대 84학번 어머니는 “저는 학교를 총 9년 다녔다”며 “아들이 공부를 재밌어했고, 대학에서 장애인 편의 시설과 활동 도우미 등 지원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특히 흑인 힙합 동아리 활동은 박씨가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경험”으로 꼽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음악을 듣고 피드백하는 ‘리스너(listener)’로 가입했다가 비트박스 파트를 맡았다. 거리 버스킹 등 무대에도 섰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 소극장에서 공연할 땐 동아리 친구들이 박씨를 휠체어째 들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틈틈이 쓴 가사로 여러 작사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 평소 쉴 때는 가수 아이유 음악을 즐겨 듣고, 콘서트를 찾아다니는 팬심(Fan 心) 가득한 청년이기도 했다.

이후 덕수중 재직 중에는 힙합 동아리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던 학생들이 점차 당당해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학생들이 써준 편지들이 보관돼 있었다. “몸이 불편해도 열심히 하시는 선생님이 대단하고 멋지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박씨는 자신과 학생들이 직접 쓴 글을 모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품집을 만들었다. 맨 앞장에 담긴 그의 편지엔 방학식 날짜가 적혀 있었지만, 이날을 일주일 앞두고 학생들과 작별했다.

부부는 아들이 떠난 지 약 한 달 만에 서강대를 찾았다. 처음에는 1500만원을, 다시 500만원을 더 기부했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아버지는 “큰돈이 아닌데도 관심을 받으니 오히려 기부 문화가 더 활성화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안씨는 앞서 84학번 동기들과 20년 가까이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했다고 한다.

이제 안씨는 아들 박씨가 남긴 ‘버킷리스트’를 대신 이뤄갈 계획이다. 첫 목표는 아들이 남긴 메모와 습작으로 자서전을 엮는 일이다. 안씨는 “지난 30년간 아들도 나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던 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아 있으니 기회도 있다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고 싶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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