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시계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벽시계 안에는 일정하게 움직여야 할 초침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건전지가 다 닳았는지 6시부터 9시까지는 한 칸 올랐다 두 칸 내려가고, 다시 두 칸을 오르다가 기운이 달렸는지 다시 한 칸 미끄러지면서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인다. 겨우 9시에 오른 초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지막 턱걸이 하나를 앞둔 사람처럼 안간힘을 다하며 마지막 용을 쓰더니 12시라고 쓰인 꼭대기에 올랐다.
시곗바늘이 어기적대며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이런 시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가는 시계’ 말이다. 시곗바늘이 반 바퀴 도는 데 30초가 아니라 한 40~50초나 걸렸으니 이런 시계 하나만 있으면 시간을 넉넉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상에 오른 시곗바늘은 뭐가 그리 급한지 후다닥 내려가면서 결국은 60초에 맞춰 한 바퀴를 돌더니 분침을 한 칸 앞으로 돌려놓았다.
오르막길을 더디게 올라가서 내리막길을 만나면 쏜살같이 내려가는 시계처럼 세월도 끝에 가서는 급하게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온종일 하늘에 떠 있을 것만 같던 해도 때가 되면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하더니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거미가 찾아온다. 가는 길이 급하기는 달도 마찬가지다. 월초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월말이 되고 걸핏하면 달이 지나서야 달력을 넘기기 일쑤다.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달음박질하듯 달아나는 시간을 좇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저문다. 더는 시간을 붙들 힘도 없는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전지를 바꿔 끼운 벽시계는 째깍째깍 제 갈 길만 갈 뿐이다.
어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없을까?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푸념을 들었는지 나태주 시인이 그런 시계를 하나 내놓았다. 시인이 노래한 천천히 가는 시계는 수탉의 긴 울음소리로 아침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뻐꾸기의 잰 울음소리에 점심때가 지나고 있음을 느끼고, 부엉이의 더딘 울음소리에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또,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다. 시인은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고,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를 소개하면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속에 기르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천천히 가는 시계’라는 제목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도 그런 시계 하나쯤 우리 몸속에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길러야 하는 ‘천천히 가는 시계’는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으로 나이 들었음을 알게 하고, 세상을 향한 이해와 사랑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웬만한 고난쯤은 지금까지 쌓은 연륜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시계다. 또 한 해가 이렇게 옴나위없이 저물어간다. 빠른 세월을 탓하기 전에 이해와 사랑, 너그러움으로 움직이는 ‘천천히 가는 시계’ 하나쯤 우리 마음에 길러 보자. 가는 세월이야 붙잡을 수 없겠지만, 최소한 세월에 치여 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