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조선의 영광을 찾아야!
조선의 시작은 옛 조선(古朝鮮)영광을 위해 한양천도로
태조는 역사 강둑에 혼불을 담아 경복궁에 함께 심었다
궁궐은 왕권과 유교정치 이상을 품은 상징의 터전으로
백성의 안위와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는 심장부 되었다
경복궁의 나무와 돌 기왓장에 새 질서를 새겨 놓았으나
적막강산 경회루는 침탈과 세파에 지친 듯 한숨만 쉰다
북악에 어우러진 향원정은 말없이 제 향기를 머금었고
천지인 삼합 조화 이룬 전각들은 연잎에 다시 피어났다
임진왜란의 화마 속에 역사 강토는 처참하게 유린 되고
백성들의 손끝 아래 경복궁은 역사 저편 그림자 되었다
270년의 긴 공백은 쇠약한 왕조의 상처마저 간직하였고
경복궁 중건으로 무너진 위엄 세워보려 안간힘 다했다
일제는 조선의 상징을 가차 없이 짓밟으며 훼손시켰고
총독부 청사는 경복궁의 혈과 숨통을 죄이며 세워졌다
조선은 민족자존, 국민주권 빼앗기고 무너져 버렸지만
쓰라린 아픔만은 오늘의 깊은 성찰로 민족혼을 깨운다
부활한 경복궁에 공차 시차 개념 굳건하게 살려내었고
강역의 유품들은 과거 미래를 잇는 다리 되어 남았다
백성의 상처는 굳은살로 바꿔내고 민족 얼로 승화시켜
새 시대 새 역사 이어가는 자명 등불 이정표 세워보자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경복궁, 민족의 영광과 치욕을 증언하는 궁궐
민족의 영광과 상처가 교차한 무대다.
왕실의 위엄에서 임진란의 화마, 흥선대원군의 중건,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대한제국의 선포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500년의 역사를 증언하며 오늘날 강력한 교훈을 던지는 장소다.
‘하늘을 공경하고 복을 누린다’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왕조의 이상을 품었다. 근정전은 왕권의 권위를 드러내는 조정의 중심이었으며, 경회루는 대외적인 위상을 과시한 외교적 무대였다. 웅대한 건축물들은 조선의 정치철학, 유교적 질서, 왕실의 위엄을 집약한 것이다.
왕실은 임진왜란의 화염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1592년 왜군이 한양에 진입하자 왕은 도성을 버렸고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스스로 역사의 불씨를 태웠다.
경복궁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이후 270년 동안 궁궐은 방치되었으며, 왕은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옮겨 다니며 유목민 생활을 했다. 이는 공간이 가지는 공간력의 상실과 소멸을 넘어, 왕조 권력의 쇠퇴와 국가 체제의 불안정을 드러내는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결심한다. 수천 칸의 전각이 재건되며 궁궐은 옛 위용을 다시 찾는다. 근정전은 정치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왕과 대신들은 국가의 품격을 드러냈으나 외세에 의한 개혁과 쇄국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았다.
조선말 내부 분열과 갈등 그리고 외세의 압박과 침탈로 경복궁의 부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은 궁궐을 무력으로 장악했고 이에 격분한 동학군은 척양척왜, 보국안민으로 전국적인 봉기를 했다. 궁에서는 고종이 감금당하고 행동이 제약되는 굴욕의 시대가 되었으며,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당했다. 궁궐은 민족의 수난을 드러내는 굴욕의 상징이 되었다.
고종은 환궁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 독립국으로 전환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국운은 이미 쇠락하였고, 결국 일본의 국권 강탈로 이어졌다.
경회루와 향원정은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임진왜란과 일제의 침탈이 남긴 교훈을 들려준다.
오늘 우리가 이 궁궐을 찾는 이유는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울림을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함이다.

#하늘과 땅의 질서를 담은 궁궐-김세용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창건을 통해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하늘의 뜻을 만천하에 천명하고자 했다.
궁궐은 북악산을 등지고 광화문을 향해 열리며, 자생풍수와 음양오행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근정전 앞마당은 신하들이 질서에 맞게 서는 공간으로, 유교적 위계질서를 조형적으로 시각화했다. 경회루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건축물로 화려한 외교의 무대를 마련해 나라의 격을 과시했으며, 후원의 건물들은 사색과 고요함의 미학을 담아낸다.
화려한 단청과 목조건축은 장인들의 혼과 기술을 집약한 결정체다. 경복궁의 건축은 미적 성취를 넘어, 국가의 이념과 왕조의 정체성을 새긴 역사적 유산이다.

화려함 뒤에는 민생의 고통이 가려져 있었다.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고자 대규모 중건을 추진했으나, 이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부역의 고통을 안겼다.
중건은 국가적 자존심을 드러내는 사업으로 포장되고 백성들은 고혈에 시달리고 피폐해진 삶 속에서 눈물만 흘려야 했다. 왕실의 권위 유지가 민생보다 우선된 것이다.
오늘날 정치가 권위와 명분만을 앞세울 때, 그 대가는 결국 백성에게 돌아간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경복궁 중건이 남긴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화려한 권력의 명분을 세우는 것보다 백성의 삶과 생계를 우선하는 예민정신이 진정한 진짜 대한민국임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상처를 품은 교과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경복궁-황세현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겪어온 아픔과 그 너머의 회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말 그대로 역사의 교과서 같은 공간이다.
근정전과 사정전, 강녕전에 담긴 아름다움은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미학을 보여주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임진왜란의 상처와 일제강점기의 아픔,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고통스럽고도 슬픈 이야기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무너졌던 궁궐이 다시 복원된 모습은, 한때 꺾였던 민족의 자존심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경복궁을 찾는 이유는 단지 옛 건축물 몇 곳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 앞에 서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사회, 우리는 경복궁이 전하는 조용한 메시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권불 10년이라 했다. 권력은 쉽게 무너질 수 있지만, 민중의 저력과 역사에 대한 자존감은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이제는 국민주권의 ‘국민사학자시대’를 열어야 한다.

#역사! 어찌 걸어야 바른길일까?-서주원
왕의 길을 따라 경복궁을 걸었다. 경복궁에서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왕도를 안고 있는 서촌(西村) 주민이다 보니 그날 내 탐방의 발걸음은 일행들과 달리‘가을을 맞이한다’라는 영추문(迎秋門)에서 시작됐다.
경회루(慶會樓) 앞에 섰다. 조선 시대 사신의 접대와 궁중 연회가 베풀어졌던 연못 위 누각 아닌가.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경회루 풍경을 둘러본 뒤, 경복궁 탐방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근정전(勤政殿),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을 탐방한 뒤, 조선 후기 왕과 가족들의 휴식처였다는 향원정(香遠亭) 연못의 연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경복궁의 가장 북쪽에 있는 건청궁‘하늘은 맑다’라는 뜻을 품고 있는 이곳에서 고종 32년인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근처 잔디밭 그늘막 쉼터에 앉아 더위와 햇볕을 잠시 피하자니 경복궁의 낙락장송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령을 짐작하기 힘든 소나무들이 쭉쭉 솟아 하늘을 찌르기도 하고, 어떤 소나무는 기이한 형태로 긴 가지를 축축 늘어뜨렸다.

마치 용 비늘 같은 껍질을 온몸에 두른 낙락장송 몇 그루는 그 뿌리의 일부를 땅 밖으로 드러냈다. 여름 장맛비에 잔디가 사라지고 땅이 패여 그런가 본데 그 뿌리는 흡사 용의 발톱 같았다.
임금과 왕권을 상징하는 용.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모두 27명의 용이 저마다 용상(龍床)에 앉았다. 왕조의 끝은 일제 강점으로 막을 내렸다.
광화문 안 경복궁에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넘쳐나는데, 광화문 밖 광장의 차도에서는 먼 길을 달려온 지방의 촌로들까지 정권 타도를 외친다.
‘왕의 길’, 어찌 걸어야 바른길일까. 경복궁의 여러 전각도, 용의 발톱까지 드러낸 낙락장송도 내게 그 답을 일러주지 않았다. 그저 제 자리에 붙박고 서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서울=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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