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교수의 치과의사 2막1장] 덕분입니다

2024-10-23

경기도 과천시 보건소 업무대행 김영수 치과의사

필자가 경기도 과천시 보건소에 근무하기를 잘했다고 느끼는 날 중 하루가 성묘가는 날일 것 같다.

필자의 모친은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돌아가실 당시의 주거지가 ‘I’시로 되어 있어, 해당 지역의 ‘가족공원’에 모셨다.

추석 연휴 전날에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필자의 휴무일에 맞추어 마음 편히 성묘할 수 있으니, 주 2.5일 근무로 인한 박봉(?)이라 다소 불만스럽더라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추구하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에는 비교적 부합하는 편인 것이다.

성묘 가는 날, 승용차는 집에 잘 모셔둔 채 홀로 꽃 한송이와 캔에 담은 커피를 들고 공원 입구까지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여유롭게 도착하여 납골당까지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2년 전부터 성묘를 혼자 다니기로 결정한 것은, 성묘를 명절 휴가의 큰 일로 간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혼자서 납골당까지 걸어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들이 보인다.

수목장 지역에는 빼곡하게 군데군데 꽃이 놓여져 있고, 아마도 명절까지는 여유가 있음에도 부모님이나 조상님께서 지나가는 성묘객들에게 차별의 눈초리라도 받으실까봐서인지, 혹은 미리 성묘를 다녀갔나 싶을 정도로. 앞서 걸어가시는 분들을 살펴보면 혼자서 꽃 한송이 들고 가시는 노인 남자분들이 압도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필자처럼 부모님을 성묘하러 온 분도 있고, 먼저 보낸 배우자를 성묘하러 온 분도 있는 듯하다. 걸어가시는 뒷모습에서 필자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살아계셨을 때(있을 때) 잘해드릴 걸”하는 마음 속의 아쉬움이 묻어나온다.

물론 필자의 상상과는 달리 요즈음에는 성묘도 대행해 주는 서비스(?)도 있다고 하며, 필자 앞에 걸어가시는 분들 중에 그 분들도 섞여 있다고 예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비고사와 본고사 및 면접을 마친 후, 2주 정도 지나 자연과학대학 치의예과에 합격한 것 같다고, 전화 수화기에 대고 모친께 연락을 드렸던 것이 1977년 1월의 이야기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모친께서 사무실에 계셨던 모든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해 주셨고 동료들로부터 많은 축하를 받으시는 소리가 전화기로부터 전해졌다.

철저한 ‘아날로그 시대’의 이야기이다. 홀어머니께서 4형제를 모두 번듯하게 대학에 보낸 순간이어서 더욱 기쁨이 컸다고 생각된다.

6년간의 예과 및 본과 과정를 거치면서 변변한 효도를 해 드린 적도 없는 것 같고, 세월이 지나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살아생전 쓰시던 의치를 발견하고는, 부족한 막내아들의 실력이라 오랜 기간 불편하셨을 텐데 끝까지 잘 사용하려고 하셨던 모습이 떠올라 목이 메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납골당에 도착하여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혹시 모친 계신 곳을 찾지 못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쉽게 찾아내어 품에 안고 온 따뜻한 ‘라떼 커피’의 캔 뚜껑을 따고 일회용 빨대를 꽂아드렸다.

술을 드시지 못하셨던 모친에게 드릴 수 있는 과거의 ‘달달한 2:2:2 커피’ 대신 필자가 고안한 납골당 전용 성묘 음식이다. 드실 수는 없겠지만 커피가 식는 동안 필자와 모친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계신 곳은 ‘편안’하신지 여쭙기도 하고, 우리 집안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보고(?)도 하면서, ‘어머니 덕분에 평탄하게 대학도 마치고, 제가 낳은 딸이 결혼도 하여 이제는 손자까지 만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며 막내아들인 필자도 머지않아 세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찾아뵙겠다고 작별 인사를 고하고 나서 납골당에서 다 식은 캔커피를 들고 나왔다.

필자의 현 직장에서의 임기(계약 기간)는 금년도 12월 말일까지이다. 내년도 계약의 성사 여부는 아직은 결정된 바가 없다. 필자와 함께 근무하고 있는 치과위생사는 8급 지방직 공무원이다. 이곳 보건소가 의료기사로서는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일 것이다.

1986년에 경기도로부터 국립보건원 훈련부에 파견된 필자의 공중보건치과의사 시절, 당시 훈련부 구강보건담당관이셨던 김진범 과장(현재 부산대학교 치전원 예방치과교수로 정년퇴직)께서 국립보건원에서 치과위생사들을 보건소 치과위생사로 근무시키기 위해 교육시켰던 해가 ‘86아시안게임’ 근처였고, 필자도 ‘툴툴거리면서도’ 그 자리에서 노력을 보탰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업무대행 치과의사로 계약이 되어 경기도 과천시 보건소에 와서 40대의 현재 치과위생사를 만났을 때,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근무하면서 점차 피부에 와 닿는 것은, 필자가 이 분보다 윗사람이라고 느끼는 순간이라면 그냥 필자가 나이가 많아서 대접받을 수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보건소에서의 위치도 모든 행정 업무에 익숙한 정규직을 필자가 따라잡기가 어려운 것이고, 급여에서도 필자는 주당 2.5일만 근무하는 탓에, 일주일 내내 일하면서 수당까지 받는 정규직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무언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었지만 일은 편하니 머리 속에서는 ‘워라밸’에서의 혼선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금년도 계약이 끝나면 ‘이직(移職)’을 해볼까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잠시의 풍랑을 견딜 각오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거꾸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치과의사 전임자가 퇴직하고 나서 후임자인 필자를 선발할 때까지 치과위생사는 어찌 지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상사(上司)가 있다가 없어진 자리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현재의 자리를 유지했을 것이다. 선발 공고를 내어도 대우가 그리 좋지 않은 보건소 업무대행 치과의사 자리에 쉽게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편안한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하루하루였을 것 같다는 게 오지랖 넓은 필자의 상상이다.

금년 5월에 필자의 계약이 시작되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의 공중구강보건사업 진행과정과 향후의 할 일을 설명 듣고, 상사가 없는 자리에서도 꾸준히 자기 할 일을 묵묵하게 수행해 준 치과위생사에게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끔 잘난척을 하는(?) 필자가 민원인(보건소 내원 환자)을 대할 때 오해를 사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 등이나, 필자가 뱃살을 조절할 수 있도록 점심시간 산책을 권하거나 간식거리를 자제하는 등은 필자에게 덤으로 주는 선물(?)로 생각한다.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어찌어찌 살았겠지만, 일단 이 곳에서 지내면서 좋은 직원과 함께 근무하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서 필자를 배려해 주는 치과위생사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어머님의 성묘를 다녀오는 전철에서, 모친께서 필자를 키우고 교육시켜 주신 ‘사랑’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현 직장에서의 치과위생사에 대한 고마운 생각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대한치과의사협회 이사로 봉사하시다가 돌아가신 한문성 선배님(서울치대 35회)의 손윗동서인 7080가수 송창식씨가 부른 ‘그대 있음에’라는 곡의 가사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연말이 되면 다시 한번 어머님 성묘를 다녀온 후, 필자의 재계약 여부에 상관없이, 함께 일하는 치과위생사에게 윗사람이 주는 선물을 전해주려고 한다. 작은 종이카드에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P 선생 덕분에 이곳에서 잘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어 선물에 붙여 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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