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내려앉아 그리움 부르는 ‘문·담·벽’
낡은 담벼락·휘어진 철제문…
오래된 도심 골목 풍경 촬영
“오래된 것에는 역사 깃들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해”
빛 활용 ‘현재의 숨’ 불어넣어
수평·수직 구도로 생동감 획득
현대화된 초고속 아파트 단지에선 걸음이 빨라지고, 오래된 주택가에선 걸음이 느려지는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동시대에 존재하지만 시간의 온도차는 분명 존재하고, 그에 따라 다가오는 심리도 달라진다. 현대식 아파트에선 빠르게 흘러가는 자신의 현재 삶에 집중하게 되지만, 오래된 주택가에선 누군가의 삶의 여정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좁은 골목길, 오래된 담벼락, 부식한 철제 대문은 단순한 풍경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오래된 주택가에선 골목에 배어있는 타인들의 삶의 흔적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떠올리게 된다.
사진작가 이길화는 일본 도심의 오래된 골목 풍경 등 여행 중에 골목 풍경이나 그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풍경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지난 3일 개막한 그의 보나갤러리 개인전 제목은 ‘문·담·벽’이다. 대구 파동 등의 오래된 골목을 거닐며 만난 ‘문’과 ‘담’, ‘벽’ 등을 촬영한 사진들을 소개한다.
오래된 주택가는 사진작가들에겐 낯설지 않은 피사체다. 그들에겐 기억 속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자극하는 대상이어서 그 자체로 완벽한 피사체일 수 있다. 이길화가 오래되어 비루하기까지 한 골목이나 주택을 피사체로 삼은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오래된 것에는 역사가 배어있고,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실제로 그가 촬영한 골목 인근에는 재개발이 한창이다. 이미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골목이 사라진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오래된 벽돌이나 비와 햇빛에 부식된 철제 대문들을 보면 그 속에서 살았을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게 되고, 과거의 한 시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것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그 아쉬움이 저의 발걸음을 골목으로 향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허물어질듯 낡은 담벼락, 휘어진 철제문, 조그만 바람에도 덜컹거림이 들리는 것 같은 얇은 창문들 등의 세월에 부식된 그의 사진 속 대상들에서 비루함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따사로운 감성들이 풍파에 생채기 난 비루함을 저만치 물린 결과다. 비결은 햇살이다. 그는 삶의 기록 같은 오래된 골목 풍경에 햇살을 최대한 반영한다. 그에게 햇살은 박제된 과거의 풍경에 현재의 숨을 불어넣는 생명의 호흡이다.
디지털적인 터치를 부가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사진에선 짙은 회화성을 만난다. 세월이 만든 흔적들에서 자신만의 구도를 발견하고, 햇빛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다. 하지만 그런 대상을 찾아내는 것도 능력인데, 어린 시절 그림에 심취했던 영향이 없지 않다. 초등학교 때 그는 뇌손상으로 뇌병변 장애를 입었다. 화가의 꿈을 접고 카메라를 든 것도 오른쪽 수족 마비 때문이었다.
“사진 작업은 어린시절 화가의 꿈에 대한 실현이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수족 마비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은 가능하니까요.” 그림 대신 선택한 사진이었지만 회화적인 감각은 사진 작업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본격적으로 사진에 매진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이다. 2022년부터 개설한 인스타그램 계정에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고, 3천여명이라는 팔로워 수를 보유하고 있다. 왼손으로 사진을 찍으면 관절에 무리도 오고, 사진 촬영 중에 넘어지는 사고도 발생하지만 꾸준하게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상복도 터졌다. 2022년부터 최근까지 크로마틱 어워드(Chromatic Awards), 도쿄 국제 사진 어워드(Tokyo International Foto Awards), 미니멀리스트 사진 어워드(Minimalist Photography Awards), PX3 파리 사진 어워드(Le Prix de la Photographie de Paris) 등 다수의 국제 사진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오래된 골목을 거닐면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고, 사진 속에 사람이 등장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 사람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초상권의 문제도 있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아 사진 속에 등장인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하게 오래된 풍경 자체에 주목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풍경 너머의 감성까지 포착하는데 작가적인 열정을 할애한다. 그것이 곧 ‘오래된 집에서 살았을 누군가의 삶’이다. 오래된 풍경에서 인문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그의 사진은 인물 없는 인물화다. 인물의 등장 없이도 인간을 닮을 수 있었던 비결은 대상과의 지극한 대화다.
그에게 사진은 낡은 대문과 덜컹거리는 창문에 기록되어 있는 누군가의 지나간 일상들을 발견하고, 위로를 건네는 매개체로 다가온다. 이때 피사체와의 지극한 대화는 정적인 풍경에 동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의식에 해당한다. 여기에 수평과 수직의 구도의 활용은 생동감을 극대화하는 요소가 된다.
그의 나이 이제 30대 초반이다. 골목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도심 풍경에 환호할 세대인 그가 낡고 오래된 골목에 애정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겉늙었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에 간단치 않은 사연이 있다. 뇌병변 장애다. 부모의 헌신과 그의 노력 덕분에 장애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는 성장기를 보냈지만 우리사회의 편견어린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편견들을 내면의 근육을 키우는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사진 속 풍경들이 증명한다. 낡고, 소외되고, 생채기 난 대상들을 따스한 온기로 치환하는 그의 내공이 사진 속에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9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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