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2025-10-20

‘They gave their lives(그들은 목숨을 바쳤다).’

호주 캔버라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지난달 22일 찾았을 때 추모관 입구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묘석을 내리쬐는 모습에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의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전쟁 박물관을 들어선 순간 ‘그들은 목숨을 바쳤다’는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건물 안에는 세계대전 전투 장면을 정교하게 재현한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총을 맞은 전우가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와중에 적만을 바라보며 방아쇠를 담기는 병사가 보였다. 병사 모형의 표정까지 생생했다. 그의 얼굴에서 숭고함보다는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는 절박함이 먼저 느껴졌다. 전쟁 상황에선 생(生)과 사(死)의 간극이 한 끗 차이였다.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박물관엔 호주군의 한국전쟁 참전사도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해설을 보면, 호주는 2차 세계대전의 상처와 피로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명분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당시 호주는 이미 전쟁에 지쳐 있었다. 약 6년간 10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전쟁터에 보냈고, 피로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론도 싸늘했다.

하지만 멘지스 정부는 유엔 동맹과 냉전 질서 속 의무감을 내세워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전쟁기념관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동시에, 그 희생을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전시관 속 병사는 이념을 위해 싸운 영웅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결정을 대신 감당한 개인이기도 했다.

전쟁을 기념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기념이 현실의 고통을 덮어버릴 때, 기억은 추모가 아니라 미화로 변한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던 한 병사의 이야기는 국가의 자부심으로 치환될 수 있다. 물론 국가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선 숭고한 희생의 서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숭고한 서사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잊는다. 그리고 이 서사는 또 다른 전쟁의 명분으로 되살아난다.

결국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 사회가 어떤 평화를 원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전쟁을 잊지 말자는 말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자는 뜻이 아니다. 동시에 다시 싸우지 않기 위한 다짐이어야 한다. 우리가 기억을 선택하는 순간, 평화의 방향도 함께 정해진다.

다시 그 병사를 떠올린다. 총을 쥔 손끝의 떨림, 흙먼지 탓에 보이지 않는 시야,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보이지 않는 적. 옆에서 죽어가는 전우에 대한 슬픔은 신경 쓸 수도 없을 만큼 죽음의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전쟁의 기억은 감동을 주기보다 불편해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을 다시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숨을 바쳤다’는 문장 뒤에 숨은 인간의 절박함. 그 절박함까지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전쟁을 잊지 않으면서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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