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양극화 심각한데, 기본소득은 소득 불균형 심화시켜”

2026-01-01

문화체육관광부가 연말에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놨다. 1996년부터 30년 가까이 한국인의 속마음을 추적해온 ‘한국인의 의식 및 가치관 조사’의 9번째 결과물이다. 6180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 보고서를 훑어보면 한 가지 경향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인은 경제적 양극화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만, 결과적 평등을 향한 단순한 재분배 처방에는 점점 더 냉담해지고 있다. 현 정부 핵심 정책 과제인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가 더 크다.

문체부, 13~79세 6180명 조사

“기본소득이 불균형 심화” 38%

“경제 양극화 심각” 답변 89%

AI는 변수, 64%가 “불평등 심화”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0명 중 9명(89.7%)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2022년보다 소폭 늘었고, “매우 심각하다”는 비중은 18.9%에서 32.2%로 크게 뛰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도 “빈부격차”(23.2%)가 1위를 차지했고, 뒤이어 “일자리”(22.9%), “부동산·주택 문제”(13.2%)가 뒤따랐다.

“노력에 따른 격차 인정”은 61%

그런데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결과도 함께 나온다. “노력에 따른 소득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최근 10년간 꾸준히 상승해 2025년 61.8%에 이르렀고, “소득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13.5%)를 크게 앞섰다. 생계·복지 책임을 “당사자 책임”(37.6%)으로 보는 경향도 “정부 복지 책임”(31.1%)보다 높다. 2016년에는 반대로 정부 책임이 거의 2배였다. 교육에서도 “차등적 교육환경”(42.2%) 지지가 “동일한 교육환경”(27.0%)보다 우세해졌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라기보다, 한국인이 ‘격차 자체’보다 ‘격차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더 민감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대표 사례가 기본소득 인식이다. “소득 불균형을 완화할 것”이라는 기대(28.2%)보다 오히려 “소득 불균형을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38.0%)가 우세했다. 단순히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경계를 넘어, ‘일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시스템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거부감이 작동한 결과로 풀이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자유냐 평등이냐’에는 별 관심이 없고 ‘공정하냐’에 큰 관심을 갖더라”고 최근 만난 세계사 만화가 이원복 전 덕성여대 총장은 말했다. 이번 조사는 만 13~79세를 대상으로 했고, 처음으로 만 13~18세 청소년층이 포함됐다. 아직 연령별 세부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아, 이런 경향을 특정 세대가 주도했다고 단정하긴 이르다. 다만 청년층이 많이 이용하는 유튜브·소셜미디어를 보면, 실력과 노력에 따른 격차를 ‘공정’으로 여기고 ‘무임승차’를 혐오하는 정서가 두드러진다. 관료·정치인의 자녀 입시 비리, 채용 비리, 규제 정보를 미리 입수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동산·주식 투자 등은 대표적 ‘불공정’이자 ‘사다리 걷어차기’로서 격렬한 비난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조사에서 ‘집단 간 갈등의 크기’를 묻는 문항에서 세대 갈등·남녀 갈등이 커졌다는 응답이 늘어난 반면, ‘부유층 vs 서민층 갈등’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감소한 것도 흥미롭다. ‘공정하게 얻은 부는 인정한다’는 분위기가 반영된 것 아닐까. 양극화는 해결해야 하지만, 무조건 배분이 아니라 ‘불공정 해소’ 및 ‘계층 사다리 복원’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식이 이동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흐름은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말한 “각 개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물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정당성을 지니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민감성과도 맞닿아 있다. 기본소득에 반감이 큰 것은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제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재산·소득·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지급되는 정기 소득이다. 기본소득·기본주택 등이 결합된 기본사회는 재원 조달을 위해 정부가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다시 나누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다. 세금으로 나간 돈을 궁극적으로 돌려받더라도, 그 시기와 형태는 정부 결정에 좌우된다. 개인의 투자·소비 결정권이 제약받는 것이다.

나아가 국민이 소득·주거 등에서 국가에 더 의존할수록, 정부 결정에 종속될 위험도 커진다. 밀이 사회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사유재산제를 지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국가가 설령 유익한 목적을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국민들을 자기 손안에서 다루기 쉬운 고분고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난쟁이로 만든다면, 그렇게 작아진 사람들로써는 그 어떤 위대한 일도 결코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현실적 우려도 있다. 기본소득 같은 보편 현금이 풀리면 물가, 특히 자산 가격이 오르기 쉽다. 최종적으로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자산 보유자와 시장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지면서 “오히려 소득불균형이 심화될 것”이라는 응답이 자연스레 나왔으리라.

‘AI로 인한 일자리 나누기’ 51%가 동의

다만 이번 조사에서 AI 시대에 대한 응답은 변수가 된다. 시민 64.3%는 AI가 일자리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라고 봤다. 경제학자들과 IT 전문가 중에는 AI 및 관련 자본을 소유하고 잘 활용하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에서 양극화가 발생할 것이고, 근로소득 기회를 잃은 사람들의 기초생활 보장을 위해 일종의 기본소득이 필요하리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가운데 조사 대상 시민들은 “AI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51.8%가 동의했다. 더 많은 여가를 누리되 밀의 말처럼 “개인이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그 대가를 받는 시스템”은 유지하고 싶다는 대중의 의지가 읽힌다.

연말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불평등을 걱정하는 사회이지만 동시에 “평등”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자동적으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사회다. 그 사이에서 새로 떠오른 키워드가 “공정”이다. 공정은 구호가 아니라 설계다. 불평등을 줄이되 노력의 보상을 훼손하지 않는 설계, AI가 일자리를 위협하는 가운데에도 고용과 시장의 역동성을 살리되 반칙과 불로소득을 줄이는 설계. 한국인의 의식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2026년의 한국은, 그 어려운 실험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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