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카고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미국 전역에서 온 참가자들은 3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울림과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모임의 첫 시간에 진행자는 참가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에 다섯 글자로 이 모임에 참여하며 품은 소망을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 ‘날마다 기적’ ‘방향성 찾기’ ‘울림 내 안에’ ‘비움과 채움’ ‘살고 싶어서’ ‘한 박자 쉬고’ ‘한 걸음 성장’ ‘나 좀 살려줘’ ‘별을 찾아서’ ‘홀로와 함께’ ‘모름 속으로’ ‘날 놀래켜 줘’. 아주 짧은 이 표현들 속에 각자가 처한 상황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는가.
인생은 저절로 살아지지 않는다. 편안하던 일상에 금이 갈 때마다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묻곤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달한 듯 삶이 답답할 때, 지지부진한 일상에 지쳤을 때, 비일상적인 삶의 계기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물론 그것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동반한다. 낡아버린 시간을 말끔히 비우고 새로운 시간을 채우는 일이 가능할까?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더 높은 곳의 안내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가끔은 이 세상에서 천애 고아가 된 것처럼 외로울 때가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홀로됨이라면 외로움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고립감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고,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독일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홀로 있을 수 없으면 함께 있을 수도 없고, 함께 있지 못하면 홀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헤어질 결심’ 혹은 ‘깨어질 결심’이라고 자기 소망을 표현했다. 물론 영화 제목을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사느라 자기다움을 잃어버린 자기의 과거와 헤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익숙한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취약해진다는 뜻이다. 취약해짐이 두려운 사람들은 갑각류처럼 딱딱한 외피를 입고는 그것을 ‘확신’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나 확신은 올바른 인식에 근거하기보다는 무지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확신 속에 머물 때 그는 확고하게 선 듯하지만 오히려 변화에 닫혀 있기 일쑤이다. 종교적 확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넓고 복잡하고 정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정묘한 세상에 눈길을 던질 때 우리는 신비 속에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경외심이 절로 솟아난다. 경외심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이 된 세상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삶의 자리가 장터로 변한 곳에서 신비에 대한 감각은 스러진다. 어쩌면 신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 우리를 장터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낯익은 삶이 낯설어질 때, 편안하던 삶이 갑자기 권태로워질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살다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암담함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그것을 형이상학적인 우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우울감에 침윤되지 않고 삶의 기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조형예술가인 클로디 윈징게르는 <내 식탁 위의 개>라는 책에서 기쁨을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과분한 것. 그 섬광은 최악의 순간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어, 진흙탕 같은 전투 중에도 불현듯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우수 절기에 접어들었다. 눈석임물이 흘러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깨우듯 우리의 척박한 역사에도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