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카소를 잇는 천재 예술가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70)의 창의력은 경계 없이 뻗어 나가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GS아트센터에서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두 차례에 걸쳐 공연을 무대에 올린 그가 이번엔 영국 웨이크필드 요크셔 조각공원에서 조각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켄트리지는 야외에 여섯 점의 대형 조각을 설치하고, 실내 전시장에선 거대한 조각의 시작이 된 오리지널 소형 작품 등을 함께 선보인다. 현재 뉴욕 하우저앤워스 갤러리에선 열리는 개인전과는 초점과 구성이 다른 새로운 전시다.
가디언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켄트리지는 '중력의 끌림(The Pull of Gravity)'이란 제목으로 요크셔 조각 공원에서 2007년부터 현재까지 제작된 조각 작품 4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남아공 출신인 그가 해외에서 조각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에선 2015년 12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켄트리지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었고, 2016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자신이 연출한 오페라 '율리시즈의 귀환'을 선보인 바 있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야외에 전시된 6점의 대형 조각은 손으로 찢은 종이 도안에서 출발해 최대 높이 5m(알루미늄, 철)로 확장된 조각으로, 빨강·노랑·주황 등의 원색으로 녹음이 짙은 야외 공원에서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뤄 눈길을 끈다. 이밖에 메가폰 머리를 한 인물상, 고양이 등의 대형 브론즈 조각(높이 3.5m)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는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며 종이 위에 그려진 2차원 평면 작업이 입체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켄트리지는 "나는 내가 조각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처음엔 2차원 형태로 만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작품들이 3차원으로 확장된 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며 "조각 역시 내 조형 언어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판지, 나뭇가지, 자 등 켄트리지가 작업실 주변에서 얻은 재료로 제작한 말 조각부터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단편 영화 시리즈인 '커피 포트로서의 자화상'(2020-24) 등을 함께 소개한다. 또 남아공의 보컬리스트이자 안무가인 은란라 말랑구와 협업(사운드)으로 제작한 키네틱 설치 작품 '싱어 트리오'(2019)도 선보인다. '싱어 트리오'는 재봉틀과 메가폰 등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두 개의 자아' 다룬 영상 제작까지

그가 최근 완성한 영화 '커피포트로서의 자화상'은 요크셔와 뉴욕 전시에서 동시에 소개되고 있다. 자신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9편의 다큐 형식의 시리즈다. 첨단 편집 기술의 힘을 빌려 제작된 이 영화에선 두 명의 켄트리지가 등장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논쟁을 벌인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도 둘의 기억이 달라도 너무 다른 식이다. 한 명의 켄트리지는 내성적이고 드로잉을 하는 자아가 나 자신이라고 말하고, 다른 켄트리지는 연극, 오페라 등에서 협업하는 자아가 진정한 켄트리지라고 주장한다. 켄트리지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신을 촬영하며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질적인 자아에 작가의 성찰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즈는 켄트리지의 활약을 상세히 다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남아공 인권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나 식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등 인종 차별과 경제 격차 등 사회 문제를 가까이서 보며 자란 개인사, 일흔이 된 나이에도 음악과 미술, 영화, 오페라 무대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남아공 젊은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협업하며 갈수록 더 폭넓어지고 진취적이 되어가는 면모에 특히 주목했다.이런 활동은 젊은 시절 정치를 공부하고 미술과 연극, 영화를 모두 섭렵한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5년생인 켄트리지는 대학에서 정치와 아프리카학을 공부한 후 미술을 배웠으며, 파리 소재 연극학교에서 연극 연출과 마임 연기를 배웠다. 그는 한때 영화감독 일을 배우기도 했다. 이후 80년대 후반 그의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시리즈 ‘프로젝션을 위한 9 드로잉’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부상했다. 클래식과 재즈, 아프리카 토속 음악 등 음악에 대한 관심도 남달라 오페라 무대 연출도 했다.
지난 5월 GS아트센터 공연을 위해 내한한 켄트리지는 “내게 창작은 명확한 주제나 아이디어로 시작되기보다는 질문에서 출발한다”며 “내게 창작은 정답을 제시하거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의 드로잉은 테이트 모던, MoMA,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