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자유무역은 죽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기업인의 예지력일까. 지난달 26일 대만 TSMC의 사내 체육대회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창업자 모리스 창(93)은 경영진에 이런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 꼭 열흘 전이다. 회사 분위기로만 보면 덕담만 해도 될 법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에서 사실상 독주체제를 갖춘 TSMC는 AI 혁명의 순풍을 제대로 타고 최대 실적 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기업을 넘어 국가를 지키는 ‘호국신산’(護國神山)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시절부터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의 눈에는 몰려오는 먹구름이 눈에 훤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세계화는 이미 죽었고, 가장 엄중한 도전이 눈앞에 있다”고 했다. 변방의 대만 기업을 ‘반도체 패왕’의 자리로 이끈 세계화와 글로벌 분업체계에 본격적인 균열이 일어날 터이니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돌아온 트럼프, 1기 때와는 달라
자기 확신 강해지고 견제 사라져
막연한 기대 접고 속도전 대비를
세계 질서에 근본적 변화가 닥쳤다는 경고는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로부터도 나왔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기고한 칼럼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미국 유권자들의 ‘자유주의에 대한 명백한 거부’이자 ‘미국 역사의 새로운 단계’라고 명명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자유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했던 그다. 트럼피즘이 처음 부상한 2016년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당시는 단순한 ‘일탈’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다. 4년 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를 꺾고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칠 때는 다시 제 궤도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더 강력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과반수 득표에 경합주를 휩쓸었고, 의회 장악까지 눈앞에 뒀다. 이제는 “오히려 바이든의 재임 기간이 예외처럼 보일 지경”이란 것이다.
2기 행정부를 구성할 트럼프 팀도 더 균일하고, 단단해졌다. 트럼프를 견제하던 옛 공화당 주류, 이른바 ‘어른들’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채웠다. 트럼프 1기에 이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자리를 제안받았다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공짜 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에서 트럼프의 주요 공약인 ‘관세 폭탄’을 예고했다. 보조금이란 ‘당근’으로 제조업을 불러들이려 한 바이든과 달리 채찍을 휘두르겠다는 얘기다. “미국 소비자의 부담만 늘릴 것”이라며 냉소하는 주류 경제인들과 거친 설전도 마다치 않는다. ‘비교우위’와 ‘효율’을 강조하는 자유무역 이론을 그는 ‘정치적 현실’을 들어 공격한다. 그는 “경제적 효율은 가족의 안정, 강력한 공동체만큼 중요하지 않다”면서 “제조업 일자리는 중산층으로 가는 티켓이며, 안보에도 필수적”이라고 했다. 또 “비교우위는 고유한 게 아니라 한국의 철강, 대만의 반도체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산업 정책과 보조금, 무역 규제 등을 통해 창출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대표적인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역)’인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머릿속 논리가 아닌 체화된 신념을 바탕으로 한 ‘확신범’인 셈이다.
그러니 ‘보편 관세’ 공약 등을 협상 카드나 단순한 엄포로 생각한다면 오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백인뿐 아니라 히스패닉, 흑인 노동자로까지 확장된 지지를 기반으로 거침없는 속도전을 벌일 공산이 커 보인다.
낌새를 챈 세계 각국과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TSMC는 첨단 반도체를 중국에 공급하지 말라는 미국 상무부의 공문을 받자마자 중국 업체들에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오는 12월 미국 애리조나 공장 준공식에 조 바이든 현 대통령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을 초청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 방식은 여전히 트럼프 1기 시절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분야별 회의체를 가동하고,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하는 등 ‘성의 표시’를 검토하겠다는 정도다. 당정은 주요국들이 이미 시행 중인 반도체 보조금 지원, 연구개발직 근로시간 규제 완화를 이제서야 추진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나마도 야당이 동의해줄 지 미지수다.
여기에 “공약이 현실화할 지는 지켜봐야 한다”,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대미 무역 흑자는 역대 최대를 기록하며 리스크는 높아진 상태고, 상대는 더욱 강한 확신과 힘으로 무장했다. 희망 사항은 접고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지 철저한 계산과 함께 본격적인 탈(脫)세계화에 대비한 전략 마련이 시급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