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12월 육군 이등병이었던 나는 강원도 진부령 아래에서 보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그때 병사들은 야외훈련이 줄어들고 대신 한 내무반에 중대원이 모두 모여 정훈교육이란 걸 매일 받아야 했다. 내 인생 최초의 대통령 선거였는데 군인 신분인지라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내 의지와는 달리 어떤 다른 힘에 굴복해 투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훈장교들은 그다지 노골적인 교육은 하지 않았다. 나라의 앞날을 위해 한 표 한 표를 소중하게 행사하라는 게 주요 요지였다.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잠복해 있었다. 바로 한없이 쏟아지는 졸음이었다.
여덟 번의 대선 치르는 동안
승률은 반반, 좋은 세상은 아직
아홉 번째 투표 불안불안했다

중대원이 모두 모인 내무반은 좁았다. 페치카에서 발산하는 열기도 만만찮았다. 이등병들과 일병들의 자리는 당연히 앞쪽이었다. 교육은 재미없었고 함박눈 같은 졸음이 슬금슬금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목이 꺾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뒷자리의 병사가 툭툭 쳐도 그때뿐이었다. 허리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뜬 채 버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소대의 이등병은 아예 머리로 허공의 디딜방아를 찧고 있었다. 졸음은 전염성이 강했다. 휴식 시간까지 버티려면 성냥개비를 잘라 눈꺼풀을 받쳐놓아야 할 정도였다. 차라리 누굴 찍으라고 지정한 뒤 동의하는 병사들은 연병장에 나가 공이나 차라고 하는 게 속 시원하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면 이등병들과 일병들은 막사 옆 세탁실에서 얼차려를 받고 돌아왔다. 그래도 졸렸다. 저녁에 다시 집합 당했다. 빨리 선거가 끝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나는 누굴 찍었던가. 팔도에서 모인 병사들이었기에 정치색이 모두 달랐을 텐데 선거가 끝나고 결과가 발표되자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내무반에 모여 졸음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게 행복했다. 빗자루와 삽을 들고 종일 연병장의 눈을 쳐도 행복했다.
그동안 여덟 번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승률은 반이었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면 기분이 좋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울했다. 나만 그런 감정이 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선거가 끝나면 광장을 떠나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뉴스에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나 역시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소설을 썼다. 저녁이면 도서관을 나와 시장·양궁장·화장장·폐차장 입구를 지나 집에 도착했다. 탁구장에 가서 땀을 흘렸다.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나 파일을 의심하는 버릇도 생겨났다. 깜박 잊고 약을 챙겨 먹지 않은 날은 왠지 불안했다. 평소보다 가슴이 심하게 벌렁거리면 우황청심환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졌다. 오랜만에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밥과 술을 먹자고 청하면 계산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잔머리를 굴렸다. 광장은 멀리 있고 일터는 가까이 있지만 생각한 것만큼 일의 진척이나 성과가 따라오진 않았다. 연초에 보았던 토정비결은 그 내용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여덟 명의 대통령이 지나가는 동안 나도 어디인가를 매일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것인지 조금씩 지워지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가 1988년 우리는 동해안 최북단 금강산 건너편 휴전선에서 졸음을 쫓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서울올림픽으로 들썩거렸다. 그리고 89년 임수경이 방북했다. 금강산 봉우리마다 설치된 스피커에서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치는 임수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휴전선의 밤을 지나갔다. 남쪽에선 이선희의 노래를 계속 틀었다. 가끔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뿔 달린 산양이 철책선으로 다가와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남한에서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산양은 아슬아슬한 절벽에서 살았는데 움직일 때마다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덕에 졸지 않고 밤을 건너갔다. 하지만 돌 구르는 소리는 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해 겨울 산비탈의 철책까지 덮어버리는 눈이 내렸는데 눈이 얼자 먹이를 찾아 유유히 철책을 넘어오는 산양들을 대공초소에서 보기도 했다. 그렇게 80년대가 저물고 있었다.
지난 12월부터 우리의 광장은 불안했고 일터도 불안했다. 마음은 늘 두근거렸다. 휴대폰 알림음이 울리면 먼저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제는 내 인생의 아홉 번째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를 했다. 누가 될까. 그는 또 어떤 사람일까.
김도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