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브렉시트 이후 처음으로 영국과 유럽연합(EU)이 대규모 협정을 체결했다. 무역, 어업, 국방, 청년 이동성, 탄소세 그리고 식품·동물 위생 협정까지. 양측은 다시 긴밀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번 협정은 정치, 경제, 외교 측면에서 ‘브렉시트 이후 관계 재설정’의 첫 본격적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재설정’은 이상적인 화해나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양측이 마주한 경제 현실에 기반한 ‘현실적 접근’이자 트럼프 미국 정부가 야기한 복잡한 국제 질서 속에서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번 협정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무역과 통관 간소화다. 식품, 특히 동식물 제품에 대한 국경 검사가 대폭 줄어들어 공급망 병목 현상이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격 안정과 품목 다양성 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브렉시트 이후 물가 상승으로 고통받던 영국 가계에 작은 숨통이 될 것이다. 무역 측면에서 영국 식품 산업, 특히 스코틀랜드의 핵심 수출 산업인 연어 산업계는 이번 협정을 다시 온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영국은 2024년 기준 8억4400만파운드에 달하는 연어 수출의 절반 이상을 유럽연합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영국 식품기업들이 다시 유럽연합 시장으로 향할 수 있어, 중소 식품 제조업체도 재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이 밖에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0.03%에 불과한 어업 분야가 12년간의 장기 접근 협정을 통해 협상의 중심에 선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양측의 경제적 실익보다는 프랑스, 북해 연안국 등 유럽 정치권의 요구를 반영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동시에 현 노동당 정부의 정치적 기반인 영국 해안 지역 사회의 정서를 적극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정학적으로 본다면 이번 협정은 더욱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국이 유럽 안보에 대한 전통적 지지, 보장 위치에서 물러서고 있는 가운데 영국과 유럽연합의 국방 협정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전략적 행보라 볼 수 있다. 특히 1500억유로 규모의 유럽 방위 공동조달 프로젝트에 영국 방산업체가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안보는 물론 국내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청년 이동성 제도에 대한 추가 협상은 브렉시트로 단절된 양측의 인적 교류를 위한 시금석이다. 18~30세의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이 제도는 제한적이나마 ‘자유로운 이동’을 다시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일부 유럽연합 국가에서 영국 여권 소지자가 자동입국심사대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실용적인 협력의 일환이다.
2021년 보리스 존슨 보수당 정부는 유럽연합과의 관계를 “최소한의 협력”으로 정의하며 절연의 의지를 표명했다면, 현 키어 스타머 정부는 “최소한의 실익 회복”을 향한 실용주의를 택했다. 결국 이번 협정의 핵심 목표는 완전한 통합이 아니라 양측의 건설적 분리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브렉시트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유럽연합과의 공존을 다시 상상할 수 있게 된 지금 영국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