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틸법'도 제자리서 맴맴…"가계·기업 힘든데 정치만 나몰라라"

2025-10-10

33주 차 임신부 A 씨는 추석 연휴 양수가 터지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 두 곳에서 “자리가 없다”며 거절 당한 그는 가족의 차를 타고 지역 인근의 거점 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병원 측은 입원할 자리가 없다며 간단한 조치만 취한 뒤 A 씨를 내몰았다. A 씨 남편은 전국의 거의 모든 대형 병원에 연락했지만 모두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A 씨 부부는 반나절 가까이 허비한 뒤 가까스로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받아주겠다”고 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응급차를 타고 이동한 시간만 4시간에 육박했다. A 씨는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토로했다.

만약 고질적인 ‘응급실 뺑뺑이’를 개선하는 법안인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돼 시행됐다면 이런 식의 낭패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응급의료법 개정안은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응급실 수용 능력 등을 종합해서 이용자에게 바로바로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분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에서 환자 수용 능력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문제는 정국 경색으로 여야 대화가 실종되면서 이재명 정부 들어 처음으로 문을 연 정기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쟁점 법안들을 일방 처리하면서 주요 법안의 ‘합의 처리’를 위한 여야 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민주당이 비쟁점 법안으로 분류한 약 70개의 법안은 대부분 민생과 사회적 약자 보호, 산업 육성 등을 위해 처리가 시급한 법안들이다. 민주당은 이중 야당인 국민의힘과 이견이 거의 없고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10개 핵심 법안을 우선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비롯해 도서·벽지·인구감소 지역 어린이집 운영비 지원을 확대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 고용 위기 지역에 대한 특별 지원 근거를 담은 고용보험법 개정안, 임대인의 보증금 증액 상한 제한(5%) 회피를 막는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농어촌 지역 생활 인프라 확충을 위해 국고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농어촌정비법 개정안 등이 포함됐다.

주요 산업 육성을 위한 법안 처리가 지연되는 것도 문제다. 첨단 재생 의료 및 첨단 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희귀·난치병을 비롯한 각종 질환의 새로운 치료법을 제공할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첨단 재생 의료 임상 연구에 국가 지원 근거를 담고 있다. 영화·비디오물 진흥법 개정안은 K콘텐츠 확장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광고·선전물의 유해성 판단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아닌 자체등급분류사업자가 할 수 있도록 했다.

본회의 문턱에서 막힌 것은 아니지만 모처럼 여야 의원들이 한목소리를 내 발의한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 특별법)’처럼 상임위 단계에서 막힌 법안들도 수두룩하다.

여야는 공히 이런 민생 관련 법안 처리에 이견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말이 달라진다. 민주당은 과반 의석을 점해 야당 동의 없이도 자체적으로 본회의 의결을 할 수 있지만 정작 화력을 집중해 우선 처리하는 법안은 방송 3법,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대한 법률(증감법) 등 민생과 무관한 쟁점 법안들뿐이다.

그렇다고 야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내란 잔당 세력 척결”만 외치는 여당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국민의힘도 여당 독주 견제를 이유로 비쟁점 민생 법안까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적용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70개 법안에 모두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경우 강제 종결 절차를 감안해도 모든 법안을 의결하는 데 최소 71일이 걸린다. 정책 운영 실패에 대한 책임이 정부·여당에 더 크다는 점을 이용해 민생 법안을 직접 볼모로 삼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 때문에 여야 모두 민생 법안 우선 처리는 구두 선에 그칠 뿐 의지 자체가 없다는 볼멘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국내외 안팎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쌓인 상황에서 국회가 빨리빨리 매듭을 풀어야 한다”며 “여야 모두 한 발짝 물러나 정치적인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국힘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민생 법안에 협조할 마음이 없고, 민주당은 국힘과 협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며 “경제가 어려워 가계·기업 모두 신음하고 있는 판인데 정치권이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조직 잇속만 챙기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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