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루즈는 이미 떠났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했다. 거센 바람 속에 바다도 출렁였다. 단 한 글자의 착오 때문이었다. 출발 시각을 12시 PM이 아닌 12시 AM으로 착각한 실수가, 내 여행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하이킹을 함께하던 친구 두 명과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떠난 것은 칠순을 맞이하던 해였다. 우리는 존 웨인 공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애틀을 향해 출발했다.
시애틀에서 크루즈에 오르던 날,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모두가 알고 지내던 박 사장님 부부가 한국에서 여행을 와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우연에 우리는 금세 어울렸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아침에는 함께 식사하고, 저녁에는 사우나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광활한 알래스카의 자연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끝없이 펼쳐진 빙하와 눈부신 설산,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꿈속 한 장면 같았다. 빙하가 부서질 때마다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나는 거대한 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인간의 시간은 이 태고적 공간 앞에서 얼마나 덧없던가.
우리는 글레이셔 베이를 지나 스케그웨이를 거쳐, 주노의 글레이셔 하이웨이에서 처음 보는 새먼베리(Salmonberry)를 만났다. 숲은 생명력으로 가득했고, 쓰러진 나무 위에 돋아난 이끼는 부드러운 초록빛 융단 같았다.
케치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배에서 내려 항구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유난히 조용했다.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낯설었다. 연어가 산란을 위해 거센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는 모습은 삶의 역경을 넘어서는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고, 자연의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낯선 백인 여성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배는 떠났어요.”
믿을 수 없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손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다행히 크루즈 측 젊은 여성이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고,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짐은 시애틀 항구에서 찾을 수 있다”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시애틀행 항공권도 도와 구입해 주었다. 우리는 핸드백 하나만 가진 채, 하룻밤을 케치칸의 호텔에서 보내야 했다. 가까운 마켓에서 치약과 칫솔, 로션을 사는 것으로 밤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문득 사우나에서 만나기로 했던 박 사장님의 부인이 떠올랐다. 우리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각자 시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임을 인정했다. 함께였기에 두려움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하며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케치칸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향했다. 크루즈는 다음날 도착 예정이었기에, 우리는 시애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친구의 사돈 덕분에 유명한 마운트 레이니어를 오르는 행운도 누렸다. 아름다운 풍광이 어제의 당혹감을 조금씩 씻어주었다.
이튿날, 크루즈가 도착하는 항구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수천 개의 수하물 사이를 헤매던 순간, 정확한 위치 정보 덕분에 우리의 짐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껴안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권, 비상금, 약, 운전면허증….
“모든 게 그대로야. 정말 다행이야.”
이번 여행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인생이라는 항해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 한 풍랑이 찾아온다. 그럴 때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옆에 있는 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남편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치 못 한 지출 이야기에 남편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건넸다.
“그럴 수도 있지. 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삶은 언제나 예상 밖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다시 웃을 수 있다. 알래스카의 대자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빛났던 것은, 벗들과의 우정이었다. 이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앞으로도 함께 웃을 날들을 꿈꾼다.
엄영아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