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의전쟁이야기] 러·우 전쟁과 다시 돌아온 소모전

2025-09-14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때 미래 전쟁의 전형처럼 여겨졌던 첨단 무기 중심의 단기전 구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은 지뢰밭과 참호, 포탄과 대규모 동원이 지배하는 장기 소모전이었다. 과거의 전쟁 양상이 귀환한 것이다.

2022년 2월 침공 당시 러시아의 목표는 단기전이었다. 기습 공격과 함께 사이버전, 정치·심리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우크라이나 정부를 단기간에 붕괴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수도 함락에 실패했고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과 서방의 신속한 지원 속에 단기전의 환상은 무너졌다.

이후 전장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군은 광범위한 지뢰밭과 참호선을 구축해 우크라이나의 반격을 차단했고, 우크라이나군은 서구식 기동전을 시도했으나 돌파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병력과 장비를 소모했다. 서로를 녹다운시킬 결정적인 힘이 부족해지자 전투는 화력 중심의 포격과 진지전을 반복하는 소모전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드론과 정밀무기는 전투 효율을 높이는 보조 수단에 그쳤고, 전장의 주인공은 여전히 포병이었다. 그러나 포병 역시 탄약이 바닥나면 무용지물이었기에 결국 전투의 승패는 “많은 포탄을 얼마나 오래 쏠 수 있냐”에 달리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산업 능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공장을 개조하고 전시 동원 체제를 가동해 포탄과 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서방은 평시 조달 체계에 묶여 있어 생산 능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어려웠고 지원 역시 정치적 합의라는 제약을 받았다. 미국은 첨단 무기가 넘쳐나지만 장기 소모전을 뒷받침할 산업적 토대가 약했고, 유럽 역시 에너지 위기와 제조업 위축 속에 러시아의 물량 공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병력 동원 역시 여전히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부분 동원을 통해 전선을 유지했지만, 사회적 반발과 전선 이탈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는 북한군의 참전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역시 대규모 징집을 이어갔으나 막대한 인명 손실로 인해 징집 연령 확대와 해외 거주자 귀환 문제까지 불거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현대전이 첨단 무기가 전장의 외형을 바꾸었을 뿐 여전히 과거의 전쟁 양상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 소모전의 양상 속에서 산업 능력과 병력 동원, 그리고 ‘포탄’이라는 고전적 요소가 여전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이 전쟁의 교훈은 우리에게도 분명하다. 단기전의 환상에만 젖지 말고 장기 소모전에 맞설 산업 기반과 인적 자원 그리고 정치적·군사적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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