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개역

2024-07-01

현진숙 / 제주복식문화연구소장

장마 전에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장마가 시작되고 말았다. 부랴부랴 오일장이 서는 날 김치담글 열무와 이것저것 준비하고, 두불콩도 사려고 할머니 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손수 농사를 지은 채소를 다듬어 가며 눈길은 손님을 향해 기회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자식들 신세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이시니 여기 나오신 할머니들도 같은 생각이겠지. 이곳저곳을 돌아보는데 장터 한쪽 구석에 할머니가 삐뚤삐뚤 ‘보리개역’ 이라고 쓴 비닐에 담은 미숫가루 몇 개를 채소 위에 올려놓고 팔고 있었다. 보리 개역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푸근하고 정겹고 반가웠다. 그렇지, 장마지. 장마에는 보리 개역이지. 오래전에 먹었던 보리 개역 맛이 순간 떠올랐다.

제주도는 장마가 오기 전에 무척 바쁘다. 부리나케 보리를 수확해서 장마 전에 말려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방앗간이 없을 때 보리로 밥을 지을 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자매와 맷돌을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 반드시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 몇 번이나 들어 있어서 장마철에는 쉽게 보리쌀을 만들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리쌀 대신 껍질 있는 상태에서 무쇠솥에 넣어 볶은 다음 맷돌로 갈아 채로 쳐서 그 가루를 식사 대용으로 먹었던 것이 보리 개역 즉 보리로 만든 미숫가루이다. 보리 개역은 주로 겉보리로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겉보리는 토질이 좋지 않은 땅에서도 농사가 되지만 껍질이 두꺼워 껍질 벗기기도 어렵고 또 쌀이 많지 않았다. 두꺼운 겉보리 개역은 아무리 채로 쳐서 껍질을 걸러내도 거칠었지만 보릿고개를 넘었던 사람들이라 먹을 수 있음이 다행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간식으로 먹었던 보리 개역은 쌀보리로 껍질을 벗겨내어 만들었기에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최고로 보리 수확을 하고 장마가 들면 먹을 수 있는 우리의 세시 음식이 되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냉수에 탄 보리 개역을 들이키면 최고의 청량음료이고 또 밥이 상하는 징조가 보이면 보리 개역으로 비벼 먹으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미숫가루가 기호에 따라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시대다. 밥을 못 먹는 시대가 아니라 안 먹는 시대를 살면서 보리 개역을 먹었던 이야기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장터에 가지고 오면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사라질 때가 오고 있다. 지난 시간과 추억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값진 의미가 담겨 있어도 소용이 없는걸.

보리 개역은 절박한 그 시대를 살아낼 수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이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