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이·눈

2025-02-13

김길웅, 칼럼니스트

몸도 지치면 처지고 기계처럼 나날이 닳고 녹슨다. 젊었을 때 싱싱했던 몸이 50~60대를 지나면서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퍽 하면 오작동하거나 힘이 빠져 제 기능을 못하고 조직에서 이탈을 일삼는다. 있는 줄 모르고 고분고분하던 것들이 탈이 생겨 막히고 닫히고 주억거리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고 하찮던 것들이 당차게 한 구실 해왔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풀잎에 이슬 구르는 소리도 들리던 귀가 이젠 아득한 천둥소리로 잦아들었다. 밤새 치통으로 몸의 핵을 흔든는 고통을 겪거나, 내 손으로 쓴 글조차 안 보여 다중렌즈를 써도 눈앞이 혼란스러럽다. 돋보기로 바꾸고 확대경을 들이대도 어룽거려 책을 덮던 순간의 허무감이라니. 오랜동안 읽도 쓰도 못한 채 주저앉았던 날들의 숨 막히게 고독했던 순간들.

콩알만한 게 돈 덩어리인 보청기를 끼워 넣고, 섭생의 맛을 즐긴다고 임플란트를 심느라 치과를 드나들며 또 큰돈을 들였다. 팔십 늘그막에 뜻밖의 무리수로 휘청댔음은 물론이다. 맞닥뜨린 운세에 몸의 소중함을 한차례 뼈저리게 겪었다.

눈앞이 어스름 달밤같이 침침해 오자, 절망했다. 읽고 쓰는 게 일상인 작가에게 눈에 나타난 어둠의 징후에 호되게 질렸다. 주위에서 백내장이라 했다. 노폐물에 수정체가 덮여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받는 게 백내장 수술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은근히 자연치유를 기대했다. 소싯적 무의촌에서 자란 버릇이 그냥 남아 있었다. 안과에 갔더니, 심하다며 의사가 혀를 찼다. 왼쪽 눈은 엉망이란다.

가까스로 대학병원에 수술을 예약했다. 연말에 진료를 받았는데 다음해 2월 초순에야 수술이라니,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새해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어간 일없이 무모한 시간이 불쏘시개가 돼갔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둠의 시간이 정신의 결핍 속에 지루했다.

고대하던 수술이 진행됐다. 눈에 소홀했던 형벌인가. 한파에 폭설로 덮인 길을 아들 차로 일주일을 더듬었다. 자식들에게 대접받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검사 뒤, 환자복으로 갈아입어 침상에 누웠는데, 간호사가 오가며 수없이 점안액을 넣는다. 눈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물인 모양이다. 수술은 의외로 간단했다. 눈가를 몇 번인가 훑어내는가 싶더니, 눈을 세차게 씻어 낸다. “이제 끝났습니다.” 다섯 시간의 회복 뒤 집에 돌아와 수술로 금식한 뒤 먹는 밥이 꿀맛이었다.

수술 경과를 두세 번 체크하는 것으로 눈 수술이 종결됐다. 이런 신기할 데가. 눈앞을 덮고 있던 안개의 징후가 말끔히 걷혔잖은가. 한동안 비웠던 책상으로 달려가 책을 펼쳤다. 활자들이 단비에 씻긴 에메랄드 5월의 하늘처럼 말갛다.

이제 내 귀, 이, 눈이 아이 때로 돌아왔다. 늙었지만 말을 듣고 밥을 먹고 사물을 보는 게 명료해졌다. 들썩이는 소리에 건넌방에서 달려온 아내가 “또 시작하려고요?”라는데, 마침 집에 왔던 작은아들(의사)이 한소리한다.

“아버지는 써야 합니다.”

은근한 응원이다.

불끈 정신줄이 일어선다. 써야지, 다시 쓰자.

베란다 창 너머로 눈부시게 열린 하늘로 겨울 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눈을 청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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