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그래, 바로 이 맛이야!’

2025-04-29

“그래, 이 맛이야.”

JTBC 주말극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극 중 이해숙(김혜자)의 수양딸인 이영애(이정은)는 해숙의 요리를 맛보다 이 대사를 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겠으나, 이 대사는 김혜자가 27년 동안 전속모델로 활동해 최장수 모델 부문 기네스에 올라있는 조미료 브랜드의 광고에 나왔다.

요리의 깊이와 감칠맛을 더해주는 조미료를 맛보며 하는 이 대사는 김혜자에게야 말로 어울린다. 그는 게다가 조미료가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도 긴 세월인 ‘환갑’을 넘는 64년 연기 생활로 대한민국 방송가를 관통한 그는, 대한민국인의 정서 그 원형질을 가장 잘 가지고 있는 주재료였다. 심지어, 그 주재료는 시대에 따라서 자신을 바꾸고 유연하게 지금 입맛에 적응까지 해낸다.

김혜자는 지난 19일부터 JTBC 주말극으로 방송 중인 ‘천국보다 아름다운’에 이해숙 역으로 출연 중이다. 2011년 ‘청담동 살아요’로 인연을 맺고, 2019년 ‘눈이 부시게’로 관계가 깊어진 김석윤 감독과의 세 번째 작품이다. 또한 김석윤 감독이 구상한 ‘김혜자 트릴로지(Trilogy·3부작)’의 대단원이기도 하다. 그는 극 중 평생을 다리가 아픈 남편 고낙준(노역 박웅)의 수발을 들기 위해 일수를 하다가 죽어 천국에 간 인물을 연기한다.

자신도 예상 못 한 천국에 갔더니 ‘80 먹을 때가 가장 예쁘다’던 남편은 젊은 모습(손석구)으로 있다. 부아가 나는데 갑자기 이상한 여자 솜이(한지민)가 등장해 고낙준에게 파고든다. 사후세계, 즉 천국의 모습도 지금 이승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전개지만 김혜자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히 땅에 발을 붙인다.

극 중 해숙의 모습은 다채롭다. 우리가 흔히 최근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노역의 범위를 벗어난다. 살아생전 해숙은 평소 일수를 다닐 때는 온갖 욕을 들어먹는 ‘냉철한’ 일수꾼이었지만, 남편 앞에서는 애교쟁이로 변신한다. 죽어서 다시 남편을 만날 때는 나이 든 외모로 만난 자신을 한탄한다. 어쩌면 많은 작품에서 그저 집에 앉아있거나, 그저 ‘오냐오냐’하던 인지한 할머니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입체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1961년 KBS 공채, 무려 ‘1기’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경력 초반 자신의 연기에 실망해 연기를 멀리했다 1969년부터 본격적인 TV연기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는 엄마, 1980년부터 22년을 이은 ‘전원일기’에서는 ‘국민 며느리’로 올라섰다. 1991년 ‘사랑이 뭐길래’에서 남편에 기죽는 아내 순자, 1993년 모성애가 강조된 ‘엄마의 바다’ 등도 인기를 얻었지만, 김혜자의 모습은 당대 대중이 요구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전환점은 ‘봉테일’ 봉준호 감독과 함께 왔다. 2009년 개봉한 봉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엄마 역으로 출연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11개의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따냈다. 모성애라는 기본 틀에 집착과 광기가 덧대어진 그의 모습에서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후 등장한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 등의 작품에서 다채로운 노년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더는 어느 장르에, 어느 배우의 상대역으로 부속되는 배우가 아닌 스스로의 품으로 여러 연출자와 배우들을 불러들이는 ‘거장’이 돼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연예인 해외봉사의 초창기부터 발걸음을 이었던 다양한 기부활동은 그의 선한 영향력을 더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젊은 세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락이 가격보다 풍성하다고 해 ‘혜자스럽다’는 표현이 ‘가성비가 좋다’는 쪽으로 인식돼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배우 김혜자의 모습도 그렇다. 스스로의 치열한 노력과 고민으로 여전히 성장하는 80대의 배우는 여전히 대중에게는 손쉽게 빛나는 연기를 볼 수 있는 ‘혜자스러운’ 가성비의 대명사로 꼽힌다.

김석윤 감독 전작 ‘눈이 부시게’에서 삶의 유한함을 표현했던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도 넘어가 죽음의 무한함,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지금 삶의 진짜 가치를 보여준다. 그 어떤 80대 배우가 귀여운 모습이 어울리고, 순식간에 눈빛이 변하는 모습으로 장르를 설명하며, 후배 손석구와의 부부호흡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래, 바로 이 맛이야”라고 읊조리던 김혜자의 연기는 딱 바로 그 맛으로 지금의 안방극장에서 ‘거장의 경지는 여전히 유효함’을 온몸으로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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