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개소리’(KBS)를 뒤늦게 봤다. 연말 시상식에서 주연 이순재씨가 대상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소감을 말하는 쇼츠를 본 뒤였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그가 말한 대로 “이순신 같은 역사물의 주인공도 아니고” 시트콤 형식의 드라마에서 아흔 살에 공로상이 아닌 대상을 받았다. ‘개소리’에는 이순재 외에도 김용건·임채무·송옥숙·예수정 등 60대 이상의 노년 배우들이 나온다. 물론 그전에도 ‘디어 마이 프렌즈’나 ‘눈이 부시게’ 같은 노년을 소재로 한 뛰어난 드라마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늙음을 향해 매일 달려가는 처지지만, 노년을 다룬 드라마라고 하면 그다지 신나게 끌리진 않는다. 아마도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이순재 상투 탈피 역할로 대상
OTT 드라마도 긍정적 노년 주목
섬세·경쾌한 노인극 많아져야
영화나 드라마 속 노인은 젊은 주인공 배경에 있는 듯 없는 듯 머물거나, 치매나 존엄사 고민으로 너무 부담스러운 주인공이 되거나, 과거의 회한에 찌들어 있곤 한다. 또 세상을 달관한 표정으로 너그럽거나, 가족과는 어쨌든 화해하며, 적어도 삶의 지혜나 깨달음 한마디는 일깨워줘야 존재감을 드러내는 역할로 등장한다. 하지만 오래 살아도 너그러워지지 않고, 쉽사리 화해하지 않으며, 노년의 깨달음이나 지혜 따위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내 주변의 현실이다. 그래도 유령처럼 잊히고 싶지는 않고, 무거운 생존의 고민을 화면에서 마주하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은 현실 도피적 감정도 있다. 그런데 ‘개소리’가 살인 사건 등을 소재로 한 추리물이라는 소개글에 마음이 확 끌렸다. ‘노년+미스터리+코미디’라는 키워드 조합은 최근 가장 흥미롭게 본 해외 시리즈 두 편의 공통점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디즈니+)다. ‘신부의 아버지’에 출연했던 스티브 마틴과 마틴 쇼트, 그리고 젊은 톱스타 셀레나 고메즈가 한 팀이 되어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2021년 첫 방송 이후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현재 시즌 4까지 나왔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스팅, 메릴 스트립, 에바 롱고리아 등 톱스타들이 줄줄이 출연 중이다.
극 중에서 왕년의 TV 스타와 뮤지컬 연출가로 등장하는 두 노배우는 여전히 비싼 아파트에 살지만, 은퇴 후 외로움과 금전적 문제에 시달리며 허세로 현실을 버티고 있다. 그런데 살인 사건을 팟캐스트로 중계해 돈도 벌고 존재감도 되찾겠다는 목표가 생기자, 삶이 아연 활력을 되찾으며 천방지축 뛰어다닌다. 젊은 셀레나 고메즈는 틈만 나면 옛날 명성을 들먹이면서도 현실감은 없는 두 노인을 한심해하지만, 결국 팟캐스트를 성공시키겠다는 목표를 위해 파트너가 된다.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의 추진력이 능숙하게 전개되는 와중에도, 노년의 연기자들은 사랑에 빠졌다가 외면당하고, 아들에게 다가섰다가 환영받지 못하며, 과거의 기억에 발목이 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노년은 실수와 회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익힌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거나, 수십 년간 쌓아온 패션 감각과 와인 지식 같은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삶을 재연할 때 드러나는 발랄함과 평생 간직한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이 인물과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스티브 마틴과 마틴 쇼트의 엉뚱하면서도 발랄하고, 그러면서도 우울한 코미디 연기는 젊은 배우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스파이가 된 남자’(넷플릭스)는 작년 11월 공개된 신작으로, ‘굿 플레이스’의 주인공 테드 댄슨이 아내와 사별한 전직 건축과 교수로 등장한다. 그는 “뭐라도 좀 일을 하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사설탐정 사무소를 찾아가고, 여기서 노인 요양원의 목걸이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입소한다.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보다 훨씬 느슨한 추리가 펼쳐지지만, 이 드라마는 요양원 멤버들과 주인공 스파이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노년의 우정에 대한 통찰을 섬세하게 제시한다. 치매와 죽음 같은 문제들을 내러티브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서도 노년의 삶은 상처로 가득하지만, 그들은 스파이를 흉내 내기 위해 존 르카레의 소설을 찾아 읽고, 장례식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를 읊으며 삶과 죽음의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경륜이 있다.
노년·추리·코미디가 결합된 이 드라마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유는 아마도 이럴 것이다.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목표가 생김으로써 노인들은 바쁘고 활기찬 주인공으로서 긍정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일생 동안 쌓아온 감정과 경험을 곳곳에 펼쳐 놓아야 하기에, 내러티브의 속도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빠르지 않다. 또한 코믹한 캐릭터와 분위기를 더해 진지한 주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경쾌함을 유지한다. 고령화 시대에 더 사려 깊고 경쾌한 노인 추리 코미디들이 많이 나와주길 기대한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