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소설

2025-05-27

문학을 오래 읽지 않고 있으면 불안해진다. 문학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널리 읽히는 소설가 중 성해나가 있다. 성해나의 작품은 다르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가장 두드러진 점은 속도감이라고 느꼈다.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어 읽는 나의 호흡도 가팔라진다. 빠른 템포는 현실과의 접착력이 강하다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현실은 그에게서 술술 풀리는 글이 되어 읽는 이는 배경지식이 따로 필요치 않고, 픽션과 사실을 머릿속에서 뒤섞게 된다. 소설의 시간성이 현실의 시침을 훨씬 앞서는 것이 오늘날 주도적인 문학의 한 가지 흐름이자 문체일 것이다.

빠르게 읽히는 작품도 좋지만

더디 읽힐 때는 무게감 느껴져

삶의 윤리, 나의 내면 살피게 돼

한편 이들은 시간을 역행하기도 한다. 현실이 윤리를 재빨리 흘려버리는 것을 이들 소설은 물고 늘어지며 이슈를 복기시킨다. 성해나의 단편 ‘길티 클럽’과 구병모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문단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가 대중이 들이민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한 잣대 탓에 전광석화처럼 내쫓기는 작가들 이야기다. 비판의 초점은 대중이 지닌 모럴의 속도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역설적인 점은 요즘 소설의 단문과 빠른 속도는 작가들이 사회의 표면을 담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그러면서 동시에 이를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가면 속도는 둔중해진다. 달리던 독자는 이제 걸을 수 있다. 이를테면 뒤라스의 『연인』은 읽는 이에게 ‘정지’의 순간을 반복해서 안겨준다. 문장은 단문이다. 하지만 인물을 “시간들이 후려치자” 그리 역동적일 것도 없는 사건은 멈춰 서고, 독자는 앞 단락으로 돌아가 문장을 곱씹게 된다. 등장인물의 시간이 틀어막히면 반대로 독자의 시간은 광활해진다. 읽는 이에게 속도의 제어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내 삶은 소설 속으로 깊이 들어가거나 소설이 내 삶에 깊이 침투해온다.

뒤라스의 문장에서는 공기·소리·풍경이 걸어 나온다. 사방에 안개가 자욱해지고, 혐오의 침묵은 놀라우며, 소녀와 남자가 맺는 관계는 형체가 없는 바다 그 자체다. 독자는 글을 읽는다기보다 자신을 들이마신다. 급기야 소설에서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흥미로운 점은 구병모와 성해나의 작품을 읽을 때는 ‘우리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 반면, 뒤라스를 읽을 때는 ‘나의 내면’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없이 빠르고자 하며 도덕을 잣대 삼아 틀 바깥으로 삐져나온 것들을 재단한다. 그 속도에는 경박해질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반면 나의 내면은 떨어진 보푸라기들을 쓸어 담아 간직한다. 보풀에는 지난 시간들이 뭉쳐 있고, 그것을 줍는 천천한 걸음은 중심을 비워 새것을 담아낼 여력을 늘린다.

각각의 ‘나’도 종종 시대를 급히 뒤쫓지만, 거기서 쉽게 유리되며 군중과 나는 언제나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를 ‘우리’라고 볼 수 없는 건 우리가 나를 특별히 필요로 하지 않고 내가 없어도 흔히 우리는 성립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면으로 들어가게 하는 소설이 필요한 이유는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데서 윤리성도 솟아나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현재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듯하지만, 미래의 불안을 미리 당겨와 몸집을 늘리기도 하고, 과거를 현재의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가정법을 떠올리거나 혹은 회상에 젖는다. (망각에 저항하는 회상은 윤리적이다) 그런 촉발을 일으키는 글들은 근원성을 던져준다. 역사성과 근원성은 인간의 본질이며, 특히 뒤엣것은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 소설은 이야기이지만 사건과 스토리가 핵심은 아니다. ‘없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의 ‘바깥’에서 독자는 시간을 거닌다. 200자 원고지 80매 안팎의 단편에서 스펙터클과 인과의 장치들을 최대로 구현할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음’ 역시 소설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 압도적인 예가 로베르트 발저다. 그의 단편 ‘토볼트의 삶’을 보면 “아무 내용 없음이 무게를 지”닌다. 주인공인 하인은 마룻바닥을 문지르다가 거기에 오후 햇살 한 점이 어른거리는 데서 생의 기쁨을 발견하는 자다. 독자는 여기서 “언어의 황무지화”를 맞닥뜨리는데, 형식만 완벽하면 딱히 내용과 줄거리가 없는 황무지라도 우아함을 일궈낸다. 작품의 밀당은 이처럼 언어의 수줍음과 반보 후퇴의 머뭇거림에서 생겨난다.

단어의 선택과 문장 구성은 시간을 신뢰할 때, 그리고 존재만큼 ‘무(無)’를 고려할 때 달라질 여지를 발휘한다. 중심을 휘어잡는 힘이 부서질 때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던 전망이 모니터의 빈 화면 앞에 펼쳐진다. 그렇게 해서 작품이 아름다워지면 자연히 그 작품을 쓴 이와 읽는 이 모두 전체의 아름다움 속에 포괄되면서 시간을 한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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