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이 가져다 줄 베이스캠프 효과

2024-10-20

흔히 ‘마왕’이라고 불리던 신해철은 가수로서 정점에 이르렀던 1990년대 말 느닷없이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한참 동안 음악적 실험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이유는 이렇다. 세계를 지배하던 팝송을 모범 삼아 그들만큼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 어느덧 그들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과 비슷하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저 흥미롭다는 정도의 반응에 그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수준 너머에 그들이 죽어도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경계를 감지한 순간 그만의 독창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슴 벅찬 한강의 노벨문학상

K컬처 독창성 공인받은 쾌거

젊은 세대의 목표치 높일 계기

도전적 목표 지원하는 풍토를

신해철의 토로야말로 우리 산업과 기술이 지금 맞닥뜨린 고민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도체도, 휴대폰도, 자동차도 그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중국이 더 잘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의 경쟁력은 위기에 처했다. 이제 선진국도 하지 못하는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지금의 우리는, 신해철이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만큼 힘겨운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산업과 기술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가 비슷한 대전환의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독창성

소설가 한강이 노벨상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속으로 ‘드디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적어도 문학에서만큼은 이 경계를 넘어섰다는 벅찬 기쁨이 차올랐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외국 작가들의 노벨문학상 번역본을 읽으면서 보내온 그 오랜 시절 동안 우리의 작가들은 그들만큼 좋은 문학을 창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름 성공했다. 이제 마침내 나도 그만큼 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 우리만의 고유한 경험과 생각을 풀어놓음으로써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독창적인 경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이나 오징어게임 드라마의 세계적 열풍도 같은 느낌을 준다. 적어도 K컬처라고 부르는 여러 분야에서만큼은 독창적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고, 남들이 따라 하고 싶은 고유한 것으로 공인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산에 올라갈 때는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단계씩 올라간다. 이때 베이스캠프는 산을 오르려는 모든 사람이 마음속으로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출발점 역할을 한다. 당연하게도 베이스캠프가 높으면 목표가 높아지고, 목표가 높으면 베이스캠프도 높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 5000m급 산을 오르려는 사람에게는 5000m가 마지막 남은 힘까지도 짜내서 달성해야 하는 최종목표일지 모르지만, 에베레스트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산소가 희박한 5000m 고지의 베이스캠프를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박세리 키즈와 한강 키즈

골프선수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우승하고 나서 많은 어린 친구들이 한국인도 세계 최고의 골프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들의 마음속 베이스캠프가 훌쩍 높은 곳에 쳐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지향하는 눈높이가 높아졌고, 스스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동기가 따라서 높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한국의 골프선수들, 즉 박세리 키즈들을 보는 일이 더이상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베이스캠프 효과’라고 하면 어떨까? 실리콘밸리의 창업 열기도 베이스캠프 효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스탠퍼드를 포함한 실리콘밸리 주변의 대학생들은 학부 때부터 글로벌 기업을 꿈꾸고 창업을 많이 한다. 선배와 동기들이 벤처로 시작해 산업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세계적 리더로 자리매김한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의 베이스캠프 높이가 높은 것이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분명 긍정적인 베이스캠프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노벨상 수상 소식에 달린 젊은 세대의 댓글 중에 모국어로 노벨상 수상작을 읽는 경험을 하게 되어 신기하다는 반응들이 많다. 젊은 세대 스스로 베이스캠프가 높아지는 생경한 체험을 하는 순간이고, 당연히 그들의 목표치도 높아질 것이다. 분야는 다르겠지만 이곳저곳에서 ‘한강 키즈’가 탄생할 것이다. 과학기술계에도 한강의 수상 소식을 보고 자란 한강 키즈가 높아진 베이스캠프를 발판삼아 노벨과학상을 받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으로 확신한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 줘야

당연히 기성세대와 국가가 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황당하게 보이는 도전적 질문을 들고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꾸준히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목표를 더 도전적으로 설정하고,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삼도록 해야 한다. 도전성을 논하기도 전에 무엇보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예산이 갑자기 깎이는 바람에 젊은 연구자가 재계약을 못 하고 실험실을 떠나야 하는 황당한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과학기술계에 몸담은 것이 의사만큼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기도록 전방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성공확률이 희박하다는 벤처에 나섰다가 연거푸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열려있다는 확신도 주어야 한다. 소설가 한강이 올려놓은 베이스캠프를 딛고 과학기술계의 한강 키즈가 노벨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일들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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