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걸프 3국을 방문한다. 이들 국가는 막강한 자본력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앞세워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형 외교'를 지렛대 삼아 자국 안보, 경제, 기술 이익을 극대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11일(현지 시간) CNN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사우디를 시작으로 카타르, UAE를 차례로 방문해 16일까지 중동에 머무를 예정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휴전 협상, 석유·무역·투자, 첨단 반도체 수출, 원자력 협력 등 굵직한 현안들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중동 전문가 알리 시하비는 CNN에 “걸프 국가들은 미국이 자국의 안보를 확실히 책임져주기를 원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이 분산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슈에 계속 관여하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트럼프의 순방에서 무엇보다도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지난해 미국과 사우디는 방위·통상 협정을 체결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스라엘과의 외교 정상화 문제가 꼬이며 무산됐다. 이번에는 사우디가 이스라엘 문제를 일단 유보한 채 트럼프 대통령과의 직접 거래를 통해 안보 프레임을 다시 짜려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3월 “사우디가 미국에 1조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으며, 그 때문에 방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자력 협력 문제도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민간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사우디가 미국과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해 온 ‘우라늄 자국 내 농축’ 조건을 어디까지 고수할지가 핵심 쟁점으로 꼽힌다.
UAE는 미국과의 경제·기술 협력 확대에 방점을 찍고 있다. UAE는 2031년까지 인공지능(AI) 강국이 되겠다는 ''국가 전략 AI 강국 2031' 비전을 세웠는데 이를 위해선 미국 기술의 이전과 공동 개발이 필수적이다. 미국과의 기술 밀착을 노리는 UAE는 1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내 투자를 단행했고 지난 3월엔 10년간 1조40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에 화답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순방을 앞두고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도입한 반도체 수출 규제인 ‘인공지능(AI) 확산 프레임워크’(AI 디퓨전 룰)를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우디·UAE 등은 미국산 첨단 AI 칩을 수입할 가능성이 커졌다.
걸프3국 중 미국과 강력한 안보관계를 구축한 카타르는 그동안 가자지구,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분쟁에서 미국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 왔다. 최근 시리아 신정부와의 관계를 확대하고 있는 카타르는 미국에 시리아 제재 완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직접 협상에 나선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던 마지막 미국인 인질을 풀어주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질 대응 특사인 애덤 볼러도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이건 긍정적 진전이며 우리는 하마스에 피랍된 다른 미국인 네 명의 시신도 넘겨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이스라엘에 대한 대형 항공 폭탄 수출을 재개하고 네타냐후 총리와 중동 관련 각종 현안에서 한목소리를 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볼러 특사를 통해 비밀리에 하마스와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이 하마스와 직접 접촉한 것은 1997년 테러 조직 지정 이후 처음이었다. 3월 초 이런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이스라엘은 자국을 배제한 채 협상을 진행했다며 미국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미국이 하마스와 이달 들어 직접 대화를 재개하고 미국 국적 인질을 석방한다는 결과물까지 끌어낸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감지되는 이상기류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우라늄 농축 허용 문제와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군사작전 재개 등과 관련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거듭 견해차를 보였고, 이에 양측간에 상당한 불신과 불만이 쌓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가 인질 석방이란 선물을 건넨 것은 휴전과 전후 처리 등 향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트럼프의 호의를 얻으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점쳐진다.
한편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두고 이해관계 상충 논란도 일고 있다. 트럼프 일가가 운영하는 트럼프 그룹은 사우디, UAE, 카타르 등지에서 고급 호텔, 골프장, 주거단지 개발 등 대규모 부동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 사업은 현지 정부 및 국영기업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정책과 가족의 사업 이해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여기에 카타르 왕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4억 달러(약 5598억원)에 달하는 보잉 747-8 초호화 전세기를 기증하기로 해 윤리적 문제도 일고 있다. 정가에서는 “대통령의 사적 이익과 외교 정책이 얽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