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운을 담뿍 머금은 3월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문학을 가르치는 나는 어김없이 칠판에 의자 하나를 그린다. 잘 그리지 못해서 가끔 변기같이 보이기도 하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의자’라고 부릅니다. ‘의자’라는 말과 실제 의자는 무슨 관련이 있나요?” 학생들은 일제히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언어와 의미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해요. 혹은 그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뜻에서 언어의 우연성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지요.”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문학 이야기를 한다. “문학은 언어로 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애초부터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본질과 무관합니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것을 지칭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때의 본질이란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 라캉식으로 하자면 실재계, 소쉬르식으로 기의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문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느낌, 개념, 이미지 등을 더 정확히 표현하려고 끊임없이 언어를 부수고 재창조해요. 그렇게 해서 전하려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실패하고 말 테죠. 자,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이것을 왜 할까요?”
나는 이 레퍼토리를 꽤나 오래 써먹었고, 학생들이 할 만한 답을 알고 있다. 어떤 똑똑한 학생은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하기 위해서 거듭 시도하는 거라고 말할 것이다. 글을 고치면서 더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인간의 의지를 긍정할 테다. 또 어떤 현명한 학생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독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면 실패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말한다. 정확한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실패이겠지만, 과정에서 생겨나는 창조적인 독해와 생산적인 오독을 생각하면,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성공이 된다. 창작자의 입장뿐 아니라 독자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학생들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만났다. “좋아서요. 그냥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 학생은 넘치도록 환하게 웃으면서 “자려고 누우면, 제가 쓴 문장과 오늘 읽은 문장이 같이 떠올라요. 그럴 때면 마음이 참 좋아져요”라고 말했다. 그 빈틈없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에서 아무런 거짓도 읽을 수가 없었다. 준비한 답, 자주 했던 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것을 경험했다는 충일감, 순도 높은 애정을 쏟을 때의 충만감. 나는 그 감정을 잊어버렸었던 것 같다. 요구받은 기한까지 글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매여 있다가 원고를 작성해서 보낸 후에는 미흡한 글을 쓰게 됐다는 자책에 시달리기를 반복하면서 좋아서 한다는 마음을 놓쳐왔구나 싶다.
아주 작은 보폭으로 발밤발밤 종이 위를 걸어서 표현하려던 감각에 한 발짝 가까워질 때면 희열을 느낀다. 그것은 황홀하다 못해 황송한 기분이다. 보송보송한 거위를 품에 안은 듯한 만족감을 위해서라면 남은 시간을 다 바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몇초를 견디지 못하고 꽥, 하고 달아나버리는 찰나의 기쁨일지라도. 그 벅찬 순간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문학작품이란 기호들이 배치된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소중히 올려놓은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기 위해 입술을 달싹일 때, 그것을 세계의 비밀처럼 일기장에 옮겨 적을 때, 왜인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픈 마음을 감싼 침묵의 겹을 차근차근 풀어내어 나의 연약함을 느른히 문장에 내보일 때면 더 많이 고백하기 위해 말을 양껏 배우고 싶어진다. 우리가 예술을 하는 이유는 아무리 어려운 말로 부정해보아도 지치지 않는, 좋아하는 마음 때문임을 되새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