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들아,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라!

2025-08-22

나는 혼밥을 하지 못한다. 혼자 테이블을 독차지하는 것도 눈치 보이고, 남들이 ‘저 사람은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나봐’라고 수군댈까 봐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실제 평가가 무엇이든 그들이 평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대니얼 길버트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도 그의 책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에서 “사람들은 실제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상상에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라고 했다.

누구나 남을 의식하며 산다. 하지만 의식의 강도는 자신과 타인 가운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나는 타인에 무게중심을 두는 편이다. 아내는 자신에게 더 중심이 가 있다. 그 차이는 크다.

남을 의식하다 보니 내 정체성도 모호

나 같은 사람의 특징이 있다. 우선, 남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내’가 아닌 ‘남들의 평가’가 중요하다. 남들이 인정할 만한 직업을 가지려 노력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며 살게 된다. 실제로 내 나이 쉰 살에 직장에서 밀려났을 때,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또한 원래의 나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민낯을 보여주는 걸 극도로 꺼린다. 얼핏 보면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남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다. 자신의 본모습보다는 남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를 만족시키고, 그 대가로 인정과 보상을 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라고 위안 삼는다.

그런 나는 새로운 도전도 주저한다. 실패하면 남들이 비웃을지 몰라서다. 그래서 양보와 사양을 잘한다. 마치 호의를 베푸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기적’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 ‘이기적’이라고 낙인찍히면 주변의 미움을 사, 무리에서 도태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살아오면서 양보가 결국은 이익이란 걸 알게 됐다. 내가 먼저 겸양의 자세를 취하면 결국은 더 많은 걸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나 탐내는 일은 스스로 멀리했다. 내 능력에 부치기도 하였거니와,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남들의 눈총을 받기에 그랬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 ‘겸손하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누구나 탐내는 그 일은 돌고 돌아 내 차지가 되곤 했다.

남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 좋을 때도 있다. 나는 남을 의식하며 자극을 받는다. 나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동기부여가 된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극이 없다. 자극이 없으면 반응도 없다. 반응이 없다는 건 죽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첫 직장 대우증권 홍보실에 다닐 적에는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일했다. 관계는 안정적이었고, 내 자리도 위협받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그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우그룹 비서실 홍보조직에 가게 됐다. 그곳에는 여러 계열사에서 뽑혀온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비로소 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도 어렵다. 청와대에서 일할 때 나는 내 신분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본시 공무원이었던 ‘늘공’과 어쩌다 공무원이 된 ‘어공’, 그리고 ‘실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유능한 어공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함께 살아가는 곳에는 각자의 포지션이 있다. 그 본분을 지켜야 한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서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도 없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창조의 원천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눈여겨본다. 그와 나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각기 갖고 있는 장단점은 무엇인지 파악한다. 그리고 그와 나의 것을 연결하고 융합해서 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남을 의식하는 건 나를 분발하게 한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인생은 혼자 달리는 마라톤과 같다. 내가 지금 어느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좀더 속도를 내야 하는지, 이대로 달리면 되는지 알 수 없다. 경쟁의식은 남을 의식하는 데서 싹튼다.

남을 의식하는 삶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나 같은 경우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가 중요하다. 대학 시절 배운 내용 가운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속 개념인 ‘포르투나’(운명)가 잊히지 않는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이기적인 것은 달라

신입사원 시절 첫 번째 맡겨진 일이 사사(社史)를 쓰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쓰라고 지시한 상사가 그랬다.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으니 잘 쓰지 못해도 된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쓴 책이 <대우증권 20년사>다. 실제로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그 책을 쓴 이후, ‘글 잘 쓰는 사람’이 됐다. 그것이 인연이 돼 결국 회장과 대통령의 글을 쓰게 됐다. 그때 알았다. 남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렇게 ‘대우증권 사사’가 내 운명의 첫 단추였고, 나의 ‘포르투나’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을 의식하는 강도가 점차 옅어지는 걸 느낀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내가 뭘 해도 10명 중 6명은 관심이 없고, 2명은 나를 싫어하고, 2명만 좋아한다”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탓도 있다.

나는 평생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러나 아들만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타인의 평가나 기대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살아도 된다. 또한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비교는 ‘비’참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도적 삶을 위해 관계를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독선적이고 독불장군이 되거나, 이기적인 삶을 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자율과 관계라는 어찌 보면 상충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가면 좋겠다.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 남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의견을 듣되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남과의 조화를 추구하되, 내면의 가치관과 원칙에 따라 중심을 지켜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기준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고, 그런 걸음걸음이 남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으면 좋겠다.

강물은 산과 돌을 만나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 흘러간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그 강물처럼, 외부의 장애물을 만나도 자기 길을 찾아간다. 굽이쳐 흐르지만 끝내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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