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 소총 메고 이동하며 전투…선조들 ‘항일 발자취’에 숙연

2024-07-02

홍범도 장군과 함께 걷다

중국 북간도·러시아 연해주 역사 기행

32명 답사단 육로·페리 등 이용

첫번째 답사지는 청산리 어랑촌

봉오동·용정 등 투쟁 흔적 좇아

최재형·이상설 사적지도 방문

부대 주도권 다툼 ‘자유시 참변’

고려인들 외 러시아 측 책임도

최근 유적 찾는 한국인 줄면서

기념비·간판 등서 한글 사라져

고려인 민족학교 “관심 필요”

지난해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답사의 시작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이름이 된 홍범도의 길. 대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최하고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홍범도와 함께 걷다> 1차 역사답사단이 지난달 5일부터 12일까지 중국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찾아 홍범도 장군과 동지들이 벌인 독립전쟁의 길을 따라갔다. 홍 장군의 대표적 승전 장소인 북간도의 봉오동, 청산리와 용정, 도문, 북·중·러 3국 국경지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거점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신한촌), 달네레첸스크(이만), 하바롭스크, 자유시 참변의 장소 스보보드니와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외곽의 소벳스키 마을까지. 국경을 두 번 넘으며 육로로, 페리로, 열차로, 버스로…. 2500㎞ 안팎을 32명의 답사단은 쉼 없이 달렸다.

■ 홍 장군은 어떤 마음으로 국경 넘었을까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 벌어진 전투는 위대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실패한 전쟁입니다. 독립군이 계획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비정규 군대인 독립군 대 세계 군사력 3위의 정규 군대 일본군. 그래서 정면 대결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려 했던 거죠.”

첫날, 본격적 답사지로 해질 무렵 당도한 간도 청산리 어랑촌. 답사를 이끈 신주백 교수(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의 뜻밖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신 교수는 이어 일행에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들, 본인이 지급받은 소총을 최대 몇 정까지 어깨에 메고 200㎞ 정도를 이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6정? 8정?”이라는 대답에 “눈에 띄지 않으려면 밤에 산길로 가야겠죠. 당시 독립군 1인당 평균 400발 이상의 총알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전투를 6일 동안 했다고 생각해 보면 싸울 총알도 없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곳의 10월 말은 겨울인데,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단 말이죠. 그래서 백두산 대신 우측으로 돌아서 밀산으로 방향을 튼 거죠. 군수품 지급이 가장 중요했던 거예요.”

신 교수의 설명에 모두 숙연해졌다. 눈보라가 치는 계절인데 의복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총알조차 없이 무거운 총을 메고 이동해야 하는 막막함이 마치 내 심정처럼 느껴졌다.

“그럼 전투를 한 곳이 저 산입니까, 이 산입니까?” “군수품을 지급하는 곳은 있었나요?” 30분이 지나도록 질문이 이어지며, 당시의 국제정세까지 뻗어나갔다.

홍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일주일에 어머니를,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산포수로 생활하다 1907년부터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 활동을 했다. 부인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쳤고, 큰아들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1908년 북간도, 연해주로 넘어올 때 그의 나이 마흔 살. 당시 조선인 남성 평균 수명이 30대 초반이었다고 하니 중고령의 나이다. 작은 아들만 데리고 국경을 넘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더욱 강력해진 조국 독립의 열망을 품지 않았을까. 홍 장군은 독립군 양성과 독립투쟁의 길에 매진한다.

독립군 역사상 첫 승리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 승전일(6월7일) 전날, 답사단은 봉오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봉오저수지로부터 한 5㎞ 떨어진 마을 입구에서 발을 돌려야 했다. 대신 근처의 일광산에 올라 두만강 건너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한땅(함경북도 온성군)을 바라보고, 봉오동 전투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삼둔자 전투 장소를 가늠해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 최재형, 이상설 ‘노블리스 오블리주’

1800년대부터 일찍이 가난을 피해 조선인들이 몰려든 중국 동북지역의 북간도와 러시아 남쪽의 연해주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 독립의 의지로 모여든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였다.

답사의 중반부는 중국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해 연해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와 제정 러시아가 1911년 콜레라 예방을 핑계로 이곳을 폐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으로 사실상 강제이주시킨 신한촌으로 향했다. 개척리보다 경사가 급해 삶의 공간으론 유리하지 않았던 그곳에서도 한인들은 자치기관인 권업회와 교육·언론 기관들을 만들며 번성했다.

연해주의 최재형과 이상설은 한인들의 든든한 경제적, 정신적 뒷배였다. 홍 장군도 그 영향력 안에 있었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은 1910년 이후 독립운동가 가운데 조선 정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차관급)에 올랐던 사람이다. 신 교수는 “이상설 이상의 직급이던 사람 중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라며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고 했다. 우리가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데는 (책임 없는) 양반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으리라는 신 교수의 해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 48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못 보고 병으로 눈을 감으면서 이상설은 동해로 흐르는 수이푼강에 유골을 뿌려달라면서 “동지들이여,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초기 러시아 이주 한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최재형은 연해주 항일투쟁의 대부로 불린다. 항일단체 지원과 한인들의 정착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아낌없이 마련해 준 그의 집은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 물음표만 잔뜩 남아 있는 자유시 참변

답사 5일째 저녁, 답사단은 하바롭스크에서 스보보드니까지 밤기차를 탔다. 화장실도, 좁은 객실도 불편했지만, 답사단은 더 힘들게 이동했을 독립군을 생각했다. 2월혁명 이후 스보보드니(자유)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이곳은 어떤 자유를 꿈꿨을까.

1921년 6월28일 서로를 겨눈 한인 독립군들. 홍범도 부대 등이 6월 초부터 주둔한 스보보드니역 일대와 그 전역인 체스노코프역에 가까운 수라세프카 들판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탑의 모양도 두 역이 확연히 달랐다. 현장에 와서 직접 보니 그날의 시간대별 상황, 그 전후의 상황이 더욱 생생하고 안타깝다. 이후 비극의 현장 수라세프카 들판과 독립군들이 피신한 제야강 등을 돌아본 시점에, 신 교수가 왕복 1시간30분 거리인 몰차노보(한국엔 마사노프로 알려진 곳)를 둘러보고 오자고 긴급 제안했다. 홍범도 장군이 처음 자유시로 와 몇 달간 주둔했던 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일 테지만, 한국인 중 그곳을 가는 건 처음일 것이라는 말에 모두가 기꺼이 추가 일정에 찬성했다. 단체 인증샷을 찍고, 스보보드니 인근 소벳스키 마을의 자유시 참변 추모비로 향했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검은 빗돌 왼편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한글이 쓰여 있고, 아래쪽에는 러시아어로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신 교수는 경종을 울리는 기념비의 의미를 평가하면서도, 한글 문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자유시 참변의 핵심은 독립군 간에 군사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나 코민테른 측이 이를 정리하기는커녕 경쟁을 부추기고 편승했다는 면에서 100% 고려인들만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다. 독립군들은 이후 진상을 규명해 달라, 한국 독립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알려달라는 두 가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를 조사한 자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지워지고 있는 한인 독립운동 자취들

답사 기간 중,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간도와 연해주 한인들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처음 도착한 연변조선자치주의 연길, 용정은 간판을 바꿔 달고 있었다. 중국어, 한자가 앞서고 한글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때 한국인들이 활발하게 오갔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유적들도 한글이 아닌 중국어, 러시아어로 설명돼 있었다. 신개척리 신한촌도 권업회 터와 서울거리 등에서 한인들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1999년 한민족연구소가 세운 신한촌 기념비와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기념관 등 가는 곳마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열어달라고 해야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인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코로나 이후 발길이 뜸해졌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10년 후, 30년 후는 어떻게 될까. 러시아 지역 가이드인 나타샤는 명랑한 음성으로 “나타샤,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연세대 아니에요”라며 “제가 고려인 4, 5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민족학교에서 만난 10대 소녀들의 멋진 북춤은 심금을 울렸지만 이들의 한국어는 어눌했다. 고려인학교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절절한 호소에 답사단 모두 이심전심으로 기꺼이 마음을 보탰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인 홍순계씨는 “함께하신 분들 모두 역사에 관심이 커 깊은 공감대 속에 답사가 진행된 것 같다”며 “역사만이 아니고, 역사 발전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쓴 역사전문가 주동욱씨는 “가기 어려운 곳들을 와 보니 감회가 새롭다. 역사 답사의 새 지평을 열어줘 고맙다”며 2차 답사에도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벳스키 자유시 참변 추모비에서 멈춘 답사는, 홍범도 장군의 남은 생애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 불굴의 의지로 이뤄낸 고려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주제로, 8월22일부터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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