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라 작가, 청년 여성 농부 등 9명 이야기 담아
정 작가 “계엄 후 해외서 ‘집에 군인왔냐’며 연락”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광장에 나선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 <다시 만날 세계에서>가 출간됐다.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는 광장, 남태령, 한강진 등에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사회의 현실을 목도한 이들의 경험이 담겼다. 필자로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강유정, 농업인 김후주, 영화감독 오세연, 시인 유선혜, 칼럼니스트 이슬기,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이하나, 에세이스트 임지은, 문학평론가 전승민, 소설가 정보라가 참여했다.

지난 10일 전화로 만난 정보라 작가는 “계엄 이후 아르헨티나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콜롬비아 필라르 킨타나 작가를 비롯해 제 작품을 번역한 해외 번역가 등 사방에서 연락이 왔다. ‘너희 집에도 군인이 들어왔냐’고 묻는 바람에 북한이 처들어 오지도 않았고, 전쟁도 아니며 나도 체포되지 않았다고 안심시켰지만, 사실 제 정신으로 한 얘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이후 거주지인 포항을 비롯해 대구, 서울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 연이어 참석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탄핵 집회를 경험한 9명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이번 책에 정 작가도 한 자리를 차지한 이유다. 작가는 집회 현장에서 연대의 힘도 발견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전한 한계도 느낀다.
작가는 자신이 참여한 대구 집회에서 응원봉을 든 2030 여성의 참여 비율은 서울과 다르지 않았으나 발언을 하거나 무대에서 자신을 밝히며 나서는 여성의 비율은 서울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고 지적한다. “신상 털기, 지인 능욕 등이 젊은 남성들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 여성,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여성 이주민이 정치의 광장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에서는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위험한 모험”이기에 그마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서울에서나 얼굴을 드러낸 여성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 작가는 인터뷰 당일 저녁에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했으며, 다음날인 11일 스웨덴 최대 문학 축제인 ‘릿페스트’ 참석을 위해 출국했다. 그는 “스웨덴에서 돌아왔을 때, (정상적인) 대한민국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며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을 촉구했다.

탄핵 정국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남태령’ 시위 현장도 책에 담겼다. 충남 아산에서 3대를 이어 유기농 배 농사를 짓는 청년 여성 농부 김후주씨가 기록을 남겼다. 그는 엑스(X·옛 트위터)에서 ‘향연’으로 활동하며 남태령 집회를 세간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윤 대통령에 대한 1차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뒤, 그가 엑스에 올린 ‘상여투쟁’ 제안 글이 이용자 사이에서 화제가됐고, 이 관심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전여농)의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씨는 트랙터 행진 시작부터 전농으로부터 현장 상황을 전달받아 이를 엑스에 공유했고, 관련 글은 최고 조회수 400만회를 기록했다. 지난 12월 22일 남태령에 모인 상당수 2030 여성들이 그가 엑스에 올린 글을 보고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플랫]“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는데, 이제서야 보이는 것”…2030 여성 모인 ‘남태령’
남태령에서 경찰 차벽에 막혔던 트랙터는 몰려든 시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용산 한남동 관저 앞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김씨는 전화에서 “남태령이 이렇게 극적인 승리의 서사가 될지 당시에는 몰랐다”며 “전농을 비롯해 농민운동계가 이번 계기로 대중과 조금 더 호흡할 수 있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책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담았다. 그는 “여성, 소수자 등 농민 이슈와 크게 관계 없는 이들이 모여 연대를 하고 승리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남태령은 집회 역사에서 중요한 지점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은 지난 6일 출간됐다. 다음 날인 7일 법원이 윤 대통령에 대한 구속 취소를 결정하며 윤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로 복귀했다. 책을 기획한 안온북스 대표 서효인 시인은 “남성과 여성을 나누고 세대를 구분한다기보다는 지금 목소리를 많이 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뜻으로 여성, 특히 2030 여성의 목소리를 담았다”며 “출간 당시만 해도 이제 탄핵되고 다 끝났구나 싶었는데, 윤 대통령 구속 취소 뉴스가 전해지며 오히려 이 책에 대한 반응도 더 비장해 진 것 같다”고 말했다.
▼ 고희진 기자 goji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