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뜻이 잘 통하는 가까운 지인이 하소연을 쏟아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어머니가 어느 순간부터 정치에 관심을 두더니, 극우 성향에 깊이 빠져 가정의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짜뉴스를 믿고 태극기 집회에 나가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걱정이 많은 딸은 어머니와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선거 부정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어머니는 한마디도 수긍하지 않았다. 딸은 어머니가 평생 구독해 온 보수 성향의 신문이라도 읽어 보고 판단하라고 권했지만, 어머니는 그 신문들조차 이미 ‘종북 좌파’가 됐다며 반박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극우 유튜브 채널의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그곳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어떤 사안의 사실관계를 면밀히 판단한 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을 만한 사람, 혹은 믿고 싶은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살던 당시에도 여러 종교 수행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가르침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했다. 초기 불전에 따르면, 당시 62명의 종교사상가가 존재했고 각자는 자신의 견해가 가장 우월하다고 여기며 그에 따라 수행하면 악업이 소멸하고 천상에 태어나 열반을 깨달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다른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틀렸다고 비난하며 대중을 설득하려 했다. 학습하고 사유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지식인들은 물론 그렇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혼란스러웠다. 누구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신자들 사이에서도 반목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칼라마 지역의 사람들은 붓다에게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물었고, 그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 칼라마경이다. 오늘날의 세태를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라마경에서 붓다는 ‘믿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어떤 가르침이 오랜 전통 속에서 전해 내려왔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떠돈다고 해서, 혹은 권위 있는 성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합리적인 사유와 정직한 실천 없이 단순히 믿어 버리면 그 믿음을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권위 있는 인물이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더라도, 그 말을 깊이 숙고하지 않고 맹신하면 위험하다고 붓다는 경고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교수,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의 권위와 교묘한 논리에 현혹돼 부화뇌동하며 자신의 좁은 의식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붓다는 특히 사람들이 명망 있는 스승의 말을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열렬히 추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이 우려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광장의 교조주의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극단적인 사고와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결핍·불안·고립·분노, 그리고 사적 이익이 누군가의 말에 의해 자극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맹신은 권력, 이해관계, 정치적 편향과 결합하면 더욱 완고해진다.
중세 사람들은 과연 천동설을 이해하고 믿었을까? 아니면 당시 종교 권력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믿음과 앎을 동일시했다. 실로 어이없는 착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붓다는 진리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가르침이 탐욕·분노·어리석음을 증가시키는지, 그것이 자신과 이웃에게 해로운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그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했을 때 고통을 초래하는지, 행복과 안락을 주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문자를 못 읽는 사람이 대다수였던 옛 시대나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오늘날이나,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지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대화와 소통을 이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