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 새끼 불쌍해라! 우린 어떡하니….”
경기 화성시 함백산장례식장 1층에 차려진 ‘세월호 민간잠수사’ 한재명씨(49)의 빈소에는 4일 통곡소리가 흘렀다. 백발 노모가 쓰러질 듯 벽에 기대어 오열하는 모습에 빈소를 지키던 다른 유족들도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훔쳤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한씨의 인생 항로를 바꿨다. 민간잠수사였던 그는 참사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뛰어갔다. 당시 서른아홉, 결혼을 한 달 앞둔 늦깎이 예비신랑이었다. “가지 말라”는 신부의 호소를 뒤로한 채 맹골수도로 뛰어들었다.
한씨는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 같은 교복을 입은 한 반 친구들의 시신을 직접 건져올렸다. 그중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은 아이들도 있었다.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 <나는 세월호 잠수사다>에서 한씨는 “묶인 끈을 잘라낼 때마다 생이별을 시키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지난 4월 참사가 10년을 맞았지만 한씨는 여전히 세월호를 떠나지 못했다. 동료들은 한씨가 10년 전 그날들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세월호 잠수사 황병주씨(65)는 “반년 전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도 아직 많이 힘들다고 얘기했었다”고 전했다.
세월호 참사를 넘어왔지만 현실의 삶은 더 고달팠다. 한씨는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참치집을 운영하는 등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의 한 동료는 “이라크로 가기 전에도 잠깐씩 국내에서 잠수사 일을 했다”며 “국내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보니 생계를 위해 해외로 나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씨의 주검은 먼 타국에서 숨지고도 한 달여 동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는 지난 7월23일 이라크 공사 현장으로 출국했다. 세월호 잠수구조 작업으로 앓게 된 정신적 고통과 골괴사(혈액 공급이 되지 않아 뼈조직이 죽어가는 질환)로 잠수사 일을 그만뒀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잠수 작업이 필요한 공사현장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바다는 그를 영영 데려가버렸다. 한씨는 이라크에서 첫 잠수를 한 지 약 두 달 뒤인 지난 9월25일 숨졌다. 공사업체 측은 “한씨가 잠수를 마치고 올라온 뒤 쓰러져 사망했다”고 유족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한씨의 유해는 이날 함백산추모공원에 안치됐다. 동료 잠수사들이 한씨의 관을 화장장으로 옮기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화장장에 다다르자 한씨의 아내가 쓰러지듯 관을 껴안고 흐느꼈다. 추모공원을 찾은 그의 동료는 “세월호 구조·수습 당시 힘들어하면서도 다이빙을 할 때면 습관처럼 ‘아이들이 저를 지켜주겠죠’라고 말하곤 했다”면서 “너무 고생했으니 거기서는 편안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