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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글항아리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이름을 남겼다. 독일 유대계 출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설파한 개념이다. 아이히만은 유럽에서 유대인 600만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주범의 하나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수뇌부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을 절멸로 결정한 모임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한 데 이어 피해자를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15년 간 몸을 숨겼다가 1960년 5월 23일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해외정보공작기관인 모사드에 잡혔다. 예루살렘 재판에서 그는 자신이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며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이를 바탕으로 ‘악의 평범성’ 개념을 도출했다. 평범한 인간도 이성적‧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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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일 철학자‧역사학자로서 반유대주의 관련 거짓말과 솔직함을 연구해온 지은이는 여러 대륙 기록보관소에서 방대한 자료를 발굴해 이를 바탕으로, 출세를 지향했던 나치 추종자 아이히만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아렌트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반박한다.
지은이가 증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침묵과 비밀의 은둔자로 산 게 아니라 독일의 가족을 불러들여 늦둥이 넷째까지 얻었으며, 토끼농장 관리인으로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도주자 모임에 참석해 와인 잔을 기울이고, 나치 옹호 책까지 펴낼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소설을 포함해 수많을 글을 썼다. 인류에 대한 범죄자가 나치가 혐오했던 문화산업의 하나인 출판을 통해 극단주의적 주장을 널리 알리려 했다는 점이 놀랍다.
주목할 점은 1957년부터는 아예 네덜란드 출신 나치 친위대 언론 담당 장교였던 빌럼 사선이라는 인물과 장시간 인터뷰를 하며 다량의 녹음테이프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사선 토론회’로 불리는 이 대담의 녹취록은 1000쪽이 넘는다. 이는 지은이가 아르헨티나에서 입수한 방대한 ‘아르헨티나 문서’의 골수다. 독일 슈테른과 미국 라이프 등 시사잡지가 확보한 자료도 모았다. 예루살렘 재판이 진행되고 아이히만이 유명인사가 되자 동료 나치들이 관련 자료를 여기저기 팔아 이익을 챙긴 흔적이다.
지은이는 이를 바탕으로 아이히만이 마지막까지 자신과 피해자, 그리고 역사를 용의주도하게 기만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 1939~1960년 공개된 신문‧유인물‧책에서 그를 가리키는 ‘칼리굴라, 유대인 차르, 민족학살 관리자, 이단 대심문관, 유대인 학살기술자, 최종해결사, 관료, 대량학살자’ 등의 별명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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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아이히만이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한낱 ‘도구’가 아니라 나치즘을 맹신하면서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작동시킨 정치적‧사상적 ‘확신범’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 재판에서 보여준 모습이 아닌, 그 이전의 출세 지향적이고 학살 가해자로서 개인적 이익을 챙긴 본모습이다. 평범해 보이는 모습은 반인륜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잔혹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연출됐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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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주목할 점은 사회 속 방조범과 동조자 및 신념형 지지자들이다. 지은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실제로는 침묵과 가식의 망토로 우리 가운데 있는 살인자를 보호하면서 역사적 범죄의 공범이 됐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범죄자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외려 지지자들을 업고 자신이 저지른 범행의 범죄성을 부인하려 든다고 개탄한다.
지은이는 아이히만은 물론 이들 방조자와 동조자들까지 나서 역사적 범죄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보낸 작별편지에서 ‘역사가 평가하게 내버려 두자’고 썼다. 문제의 원인을 인간 본성과 시스템에 돌리고 자신은 반성하지도, 책임지지도 않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아이히만 본인뿐 아니라, 자신은 몰랐거나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수많은 방관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원제 Eichmann Vor Jerusal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