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격변 시기에 그 변화에 동참할 기회를 갖는 일은 행운이다. 대학 내에서 존경하던 스승에게 연달아 성폭력을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반복되는 성폭력은 모범생으로 지내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거리에서 소리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게 했다. 이후로 낯선 사람들로부터 공격과 비아냥을 받으며 지냈다.
당초 이 일들은 내 인생에 일어난 비극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일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분명해졌다. 스승을 상대로 한 몇년간의 재판은 압도적 권위를 가진 존재를 대상으로 싸워 이길 수도 있음을 알려줬다. 내가 그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도 날 두려워할 수 있었다. 난 내 안의 힘을 발견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호감인 정체성, 페미니스트라는 라벨링을 수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타인의 칭찬과 승인을 기준으로 더 이상 삶을 운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를 향한 오독에 점차 의연해진다는 의미다.
돈도, 경력도, 권력도, 심지어는 승리도 묘연한 활동가로 지낸 일은 세상에는 돈도, 경력도, 권력도, 심지어는 승리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줬다. 희망을 갖기 위해 희망이 되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광장은 평범한 개인을 정치적 주체로 탈바꿈시킨다. 시민으로서의 감각은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불평을 하는 것과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 사이의 거리감을 아득히 체감할 때, 보게 되는 것은 1㎜의 변화를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노고다. 그것은 뒤에 올 사람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다. 보이지 않던 사랑을 보게 만드니, 어떻게 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상상해본다. 은둔한 청년이, 우울증 약을 먹던 여자가, 한을 품고 살던 엄마가, 알코올 중독이던 아빠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빠져나와 광장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면. 아무리 돈을 벌고 성취를 이어가도 실은 외롭고 공허했노라고 고백한다면. 상처와 결핍을 변화를 이끌 힘으로 탈바꿈시킨다면. 그러면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까? 나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증언해주기를,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다린다.
추운 겨울 이어진 집회 현장을 보며 나는 건방지게도 한국이 세계의 희망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어두운 시기에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농담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억압에도 노예화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분노는 초점이 명확해야 한다. 행동은 사랑에 기반해야 한다. 증오와 멸시는 윤석열 정부가 탄생한 힘이었다. 지난 7일 심미섭 활동가가 촛불집회에서 페미니스트, 퀴어, 장애인, 비정규직, 모든 사회적 소수자를 호명하며 광장이 이들에게도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발언했을 때, 그것은 투쟁의 논점을 흐리는 말이 아니라 유독한 군부독재 제국주의 가부장적 권력을 끝장낼 바로미터였다.
대의와 개인적인 일을 구분하며 일상 속 부정의에 무심하다면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동의했던 생각은 얼굴을 바꿔 다른 약자를 억압하기 시작하므로.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오늘의 혁명가가 내일의 독재자가 되는 모습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학살 지역에서 목도하고 있지 않나. 우리는 윤석열 퇴진을 위해 소리치면서 동시에 누가 대통령이 돼도 우리의 삶을 흔들 수 없는 때까지 나아갈 것이다.
“아아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마녀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무지로부터 여성은 돌아온다.”(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맨손으로 총을 잡고 응원봉을 흔들며 K팝을 부르는, 최고의 스펙으로 최고로 절망하는 세대가 된, 이들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알아보고 먼저 손을 잡는 사람은 누구일까.